질투와 시기의 마음을 뒤로하고
나의 사랑, 나의 고향 ‘동양서림’
나는 혜화동의 토박이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혜화에 놀러 올 때면 늘 맛집을 묻곤 한다. 하지만 내게는 웬만한 맛집보다 더 애정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혜화의 유일무이한 책방 ‘동양서림’이다. 동양서림은 1953년에 문을 열어 혜화의 토박이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오래된 동네책방이다.
동양서림에서 나는 초딩 땐 동화책을, 중딩 땐 문제집을, 고딩 땐 수능특강을, 입시가 끝난 뒤엔 소설책을 사며 자라났다. 그리고 늘 책을 사랑하는 엄마의 시선 아래서 자란 나는, 자연스레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의 산책 코스엔 늘 책방이 함께했다. 평일엔 가까운 동네책방에 들리고, 주말엔 대형서점에 가서 책 냄새를 맡던 게 그저 일상이었다. 그런 나는 중학생이 되며, 남몰래 꿈을 품었다. 그 꿈은 바로 동양서림의 후계자가 되는 것.
후계자가 될 결심
내가 기억하는 책방의 사장님은 늘 여자분이셨다. 엄마가 알려준 바로는 원래는 남자 사장님이셨는데, 지금의 사장님은 그분의 따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여자 사장님 다음에 이 서점은 누가 물려받게 될까? 바로 내가 되어야겠다고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결심이 솟아올랐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결심이라기 보단 바람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동양서림 사랑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당당히 이 사랑의 마음을 내보일 수 있었고, 또 말할 수 있었다. 언젠가 올 그 행복의 날을 꿈꾸며, 나는 서점에 들러 자주 마음이 평온을 얻곤 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내게 ‘침입자’가 나타난 것은 2018년이었다. 아니 갑자기 단층이던 동양서림에 2층 계단이 오픈된 것이다. 2층에 시집 서점이 들어왔다는 안내문을 보는 순간, 아니 이 무슨 폭풍우가 몰아칠 충격의 도가니란 말인가. 그곳의 이름은 ‘위트 앤 시니컬’이라고 하는데, 내게 위트는 전혀 없이 오직 시니컬만 불러일으키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언젠가 알바생을 뽑을 일이 생기면 꼭 나를 써달라고, 곧 성인이 되면 사장님께 말하려고 용기를 내려던 찰나였는데,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놀랜 마음을 다잡으며, 서둘러 엄마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놀라지도 않고 이 위트 앤 시니컬은 원래 신촌에 있던 것으로 이제 이곳으로 이사를 오나 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내게 건네는 엄마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 “너의 경쟁자가 생겼네, 저 아저씨가 동양서림 물려받는 거 아니야?“ 정말이지 듣는 순간 머리가 찡해져 버렸다.
그날부터 난 매일 서점 앞을 지나가며, 눈에 레이저를 켜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얼굴만 봐도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는 동양서림의 사장님이 혹시라도 사라지시거나, 그 자리에 위트 앤 시니컬 아저씨가 앉아있을까 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을 품은 채로 다행히 그 아저씨는 오직 2층에만 자리를 잡은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난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아저씨는 내게 일종의 ‘적‘ 되고야 만 것이다.
낮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여자 사장님이 계셨으나 저녁 6시 이후에 가면 2층에만 있던 아저씨가 1층으로 내려와 계산을 해주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째려보게 만드는 그 아저씨.. 그래도 내 사랑 동양서림이기에 나의 이런 마음은 숨겨둔 채로 나름대로 웃으며, 자주 책방에 가서 책을 사곤 했다. 동양서림에 들러 틈틈이 변화하는 서가를 둘러보는 것은 정말 매일 해도 지루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신간 코너는 책의 새로운 파도 속으로 나를 이끌고 가준 고마운 친구와도 다름없다.
여느 때처럼 책을 골라 계산대로 간 어느 저녁 날이었다. 그날은 시집을 2권을 샀는데, 늦은 저녁 시간이라 사장님 대신 아저씨가 책을 계산해 주셨다. 아저씨는 내가 고른 시집들의 제목을 보더니 시를 좋아하나 보다고 말을 건넸다. 그래서 당시 자작시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던 나는 시도 쓰고, 학교에 게시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저씨는 새삼 특유의 시큰둥한 표정을 짓곤 시는 취미로만 쓰는 게 좋다고, 딱 취미가 적당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흥칫뿡을 외쳤다. (속으로..) 사실 그 아저씨의 직업은 시인인데, 아니 자기는 직업으로 시를 쓰면서 왜 나한테는 취미로만 쓰라고 하냐, 참내~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찾아온 변화
2020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은 갑자기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층 안쪽 공간 한편에 앉아서 책을 읽고 갈 수 있는 ‘사가독서’가 생겨났다. 정말이지 동양서림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다하는, 짜증 나게 마음 통하는 아저씨다. 과연 아저씨는 자신이 내가 바라던 성덕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내가 아저씨보다 먼저 동양서림 2층을 사수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담긴 분노를 뒤로하고 난 더 열심히 시를 쓰고, 글을 쓰고, 동양서림에 들러 책을 샀다. 어쩐지 아저씨가 온 뒤로는 동양서림이 예전과는 다른 뭐랄까, 냉소적인 섬세함이 곁들여진 느낌이라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예전의 동양서림이 그립기도 했지만, 하는 수 없다. 애정하는 동양서림이니까.
질투와 시기를 넘어 사진 속으로
2019년 어느 겨울날, 여느 때와 같이 카페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위트 앤 시니컬 아저씨와 함께 어떤 남자와 여자가 동양서림에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우연히 포착하게 된 것이다. 희한하게도 그날따라 아저씨는 맨날 짓는 그 시큰둥한 표정이 아닌 아주 밝은 표정에 심지어 함박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도대체 누굴까 하는 궁금증으로 바라보던 찰나, 남자와 여자는 아저씨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는 아저씨. 애틋한 관계처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사진까지 찍는 그 아저씨를 보고 있으니 뭐랄까, 늘 시니컬한 표정만 짓던 사람의 색다른 이면을 본 것 같아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난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테이블 위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그날은 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우연히 그 아저씨가 운영하는 시집 서점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그날 그때 아저씨가 찍은 두 사람의 뒷모습 사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어서 더 충격적인 것을 발견했다.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 속에 그런 그들을 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내가 담겨있는 게 아닌가..!!? 아마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나인줄 모를,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내가 포착된 것이다. 또다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그 아저씨가 올린 인스타 사진에 내가 나왔어”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고 엄마는 폭소를 했다. 왜냐면 엄마는 그날 그 카페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위트 앤 시니컬 아저씨가 저 사람들 뒷모습을 찍는다고, 도대체 누굴까”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 듯 내가 얘기했던 걸 엄마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 내 모습이 참으로 뚜해서 더 묘하게 포착된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황당하고, 한편으로 별거 아닌 사사로운 일화지만, 내 마음속엔 여전히 아저씨에 대한 질투와 째려봄이 사진 속 나처럼 각인된 채로 남아있다. 종종 그렇게 지켜보는 내게 엄마는 “너 꼭 그 아저씨 팬 같아”라고 말하곤 하지만, 난 절대 아니다. 그저 예의주시할 뿐, 단지 아무도 모르게..
포기가 아닌 포용
하루는 혜화에서 애정하는 또 다른 명소인 브런치 카페 ‘브라운 에비뉴’의 야외 자리에 앉아 햇살을 즐기고 있는 날이었다. 평화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만끽하던 중에 아니 저 멀리서 동양서림 사장님이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어디를 가시지?”하는 궁금증도 잠시, 나를 지나침과 동시에 몸의 방향을 바꾸곤 브라운 에비뉴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익숙한 듯 반갑게 카페 사장님과 인사하며, 커피를 사가시는 모습을 보고 나처럼 이곳의 단골이신가 보다 하는 생각에 혼자 반가운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애정하는 책방 ‘동양서림’을 늘 동경한다. 이제는 내가 물려받고자 하는 꿈보다 사장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영원토록 동양서림의 사장님으로 그곳을 지켜주시길 바랄 뿐이다. 한편으론 여전히 동양서림에 침투한 내 꿈의 적, 그 아저씨가 자꾸만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동양서림이니까, 그 안에 룸메이트 아니 코너 속의 코너 같은 아저씨도 애증의 마음으로 품어주리라고. 그저 나는 언제나처럼 애정하는 나의 동양서림이 영원토록 사랑받는 혜화의 책방으로 머물러주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