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대학생 때 친해진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와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경우가 있으면 언제나 내가 계산을 했다. 한 살이었지만 내가 더 나이가 많기도 했고 후배보다는 내가 돈도 더 많은 거(?) 같아서 그냥 내가 계산을 했었다. 사실 대학생끼리 쓰는 돈이라고 해봤자 그렇게 큰돈도 아니고 후배한테 밥이나 커피를 사주는 게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계산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 돼 있었다. 오늘은 제가 낼게요 하던 후배는 더 이상 빈말이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신 후 계산은 당연히 나의 몫이라는 듯 계산대를 지나 가게 밖으로 나가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뭐가 먹고 싶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후배를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마음으로 후배와의 관계를 이어갔고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면 후배도 조금은 달라지겠지 하는 약간의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회인이 된 후에도 후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후배는 돈을 벌기 어렵다는 푸념만 할 뿐 내가 계산을 하는 건 여전히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그 후배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에피소드 2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 중 약속 시간에 항상 조금씩 늦게 오는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뭐 그렇게 많이 늦는 것도 아니고 혼자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일도 꽤 즐거워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 친구가 늦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5분에서 10분을 넘지 않던 지각 시간이 어느덧 20분 이상 늦는 게 기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여자 친구는 지각을 하고 나는 그런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이 돼 있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라고 약간은 내 눈치를 살피던 여자 친구는 20분 넘게 기다린 나를 보고도 더 이상 사과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맨날 늦어라고 장난식으로 이야기하는 나에게 오히려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예전에는 늦어도 별 말 없더니, 변했어라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마음도 결국은 한계에 도달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헤어졌던 건 아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관계는 끝났다.
에피소드 3
예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내 담당이 아닌 업무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내가 어떤 외국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가진 장점을 활용하여 회사에 도움을 준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외국어를 활용한다는 건 스스로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그 일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몫이 돼 있었다. 더 이상 누구도 나에게 부탁 좀 할게 라거나 고생했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며 내가 느끼던 보람도, 즐거움도 함께 사라졌다.
서로의 관계에서 언제 유효기간이 끝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지 않은 일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질 때가 내 대답이다. 그건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 전부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항상 후배의 밥값을 계산했던 것도, 약속시간에 늦는 여자 친구를 늘 기다렸던 것도, 내 담당이 아닌 일도 내 일처럼 열심히 했던 것도 어느 하나 당연한 건 아니었다. 내가 싫었던 건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상대들과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상황이 싫었다는 것이다. 물론 저런 상황들까지 다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 성숙한 사람은 아닌듯하다.
물론 나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살면서 누군가가 베푼 호의나 친절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마움을 몰랐던 순간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상대를 실망시켰던 적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당연한 건 없다는 생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은 서로 통하기에 상대도 내가 최소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은 빨리 정리하는 게 맞듯이 유효기간이 끝난 관계도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일이 당연한 일이 됐을 때가 바로 그 관계를 정리할 때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아닌 건 아닌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