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주의적 이상
얼마 전에 본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짧은 영상을 보았는데, 도덕의 계보를 해석하시는 리히트 님의 영상이었다. (철학에 관해 조예가 깊으신 분이니 흥미가 있다면 찾아서 봐보길 권한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저 영상에서 금욕주의란,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해 성직자가 내놓은 대안을 말한다. 단식하고, 육식을 금하고, 성적인 것을 금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쉽게 느끼게끔 하는 장치가 '금욕주의'다. 우리가 힘과 같이 추상적인 지표를 나타낼 때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것이 비교우위다. 난 육식을 안 해. 비건이야. 너희랑 달라.라는 식으로 쉽게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어디서 힘을 얻냐면, 자신을 통제했을 때 오는 충족감이다. 그래서 나는 저 영상을 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런 '금욕주의'로 내 자존감, 자존심, 자신감을 만들어냈으니까. 이게 저 영상에서 말하는 '힘'이다.
워낙 짧은 영상이어서 저런 금욕주의를 인정하는 영상인지, 외부에서 힘을 느껴야 한다는 얘기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을 말해볼 순 있겠지.
일단 나는 위처럼 금욕주의를 굉장히 잘 실천하는 사람이다. 전 편, 전전 편에서 말했듯 나는 스토아학파의 명예회원이다. 스토아가 현대에 넘어오면서 스토익(stoic)이란 단어가 생겼는데 뜻은 '금욕주의적인'이다. 자신의 절제를 통해 고통이나 즐거움에 쉽게 휩쓸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라고 한다.
필자가 하는 금욕의 방식은?
난 성인이 되고 난 후까지 자존감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실천한 것이 '금욕주의'였다. 그것만이 나를 느낄 수 있는 길이였으니까. 배고픔을 통제하고, 잠을 억누르고, 성욕을 억압했다. 이러한 것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는데, 내가 뭘 못할까.
요새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다. 나는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한다. 필요하면 쓰지만, 시간 죽이려고 스크롤 내리는 짓을 안 한단 말이다. 또 먹는 것을 통제한다.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자연식을 섭취하려고 노력한다. 지금은 사과나 고구마. 닭가슴살과 계란으로 매 끼니를 해결한다. 질리면 간장계란밥에 참치. 이런 식으로 최소 6개월은 메뉴를 정해놓고 먹는다. 진짜 못할 짓이다. (올드보이는 정말 불쌍한 거다.) 난 치킨 먹고 싶다고 냅다 시키지 않는다.
가끔 단식을 하기도 한다. 간헐적 단식이라고 유명한 방법이 있다. 24시간에 한 번만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어릴 때는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출근해서 밥을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근데 웬걸. 배가 고프니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럼 웃기게도 일이 잘된다. 장기도 오래간만에 쉬니 편하다. 돈이 없어서 깨달은 방법을 지금도 종종 애용한다.
성욕도 억압한다. 포르노를 절대 보지 않는다. 그런 싸구려 자극으로 내 하루를 망쳐선 안된다. 그런 싸구려가 한 번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람의 뇌는 더 큰 자극을 찾게 되고, 결국 모든 노력을 다 포기하게 되어있다. 손가락만 휘적휘적하면 자극이 팍팍 꽂히는데 노력은 무슨 노력.
잠도 정확하게 7시간 30분만 잔다. 그러면 혹자들은 '어? 생각보다 많이 자는데요?' 할 테지만, 답을 하자면 맞다. 난 잠이 정말 많다. 저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하루 종일 너무 피곤하다. 또, 몸이 너무나도 허약해서 잠이 줄어들면 일주일도 안 돼서 온갖 잔병에 다 걸린다. 장염에, 몸살에, 신경통에. 난리도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잠은 포기 못하겠다. 하지만 정해놓은 시간 이상은 안 잔다. 그것에 의미를 두도록 하자.
왜 나를 통제해야 하는가.
진짜 하루 살아가는 동안 재미가 너무 없다. 재미를 느낄 요소가 뭐 어디에 있겠나. 한국인은 밥심인데 밥도 부실하고, 맛난 거 먹는 재미도 없고. 핸드폰도 안 한다. 하지만 난 이걸 지속한다. 왜?
첫째로 잠들기 전 그 고요함에 행복을 느낀다. 난 불면증이 굉장히 심하여서 졸피뎀(마약성 수면제)을 복용하였던 적도 있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서 증상이 많이 호전되어 지금은 머리를 대면 10분 안에 잠든다. 이게 다 나를 통제한 덕이다. 내가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면 불안은 자연스레 작아진다. 잠을 잃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잠은 항상 옳다.
두 번째로는 일상의 감도가 굉장히 높아진다. 일상이 지루한가? 그러면 단식을 해라. 사람이 예민해지면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근데 그 예민함이 일상을 선명하게 받아들인다. 꽃 하나, 바람 한 점 너무 선명하다. 또, 먹는 재미를 알게 된다. 콜라? 그건 신이 먹는다는 넥타와 다름이 없다. 이렇게 기본욕구를 억압하면 하루가 선명하다. 우리가 먹는 햄버거와 아프가니스탄 출신 6살 애기가 먹는 햄버거는 당연하게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세 번째로 자존감이 치솟는다. 세상에서 이기기 제일 어려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근데 내가 이걸 알고 자신을 이겼을 때? 타인에게 받는 칭찬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기에 대한 존중이 생긴다. 다시 말해, 자존감. 나를 통제할수록 나를 더 자랑스럽게 보인다.
대니얼 카니 먼 교수의 기억하는, 경험하는 자아이론
기억하는 자아, 경험하는 자아에 이 두 친구를 아는가? 카너만 교수님의 이론인데, 경험하는 자아는 지금 먹는 아이스크림 한 숟갈에 기뻐하는 친구다. 반대로 기억하는 자아는 그 한 숟갈을 못 참았냐고 잠들기 전에 날 괴롭히는 친구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여가시간이 생겨 혼자 여유로이 책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급하게 친척이 입원을 하였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어 나보고 시간 좀 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경험하는 자아는 성질을 부린다. '아, 집에서 혼자 쉬라고!' 라며. 하지만 아픈 친척을 내가 잘 돌봐주고 집에 와서 자려 누웠을 때 기억하는 자아는 슬며시 나에게 속삭인다. '그래도 착한 일 했지, 사람다운 짓 했다.'라고.
이런 식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함으로써 나는 만족감을 느낀다. 그 당시에는 하기 싫겠지만, 그걸 이기고, 통제하였을 때 오는 커지는 자신의 힘이 있다. 순간을 이겨낸 나에게 나오는 힘.
자극의 굴레, 연쇄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자극에 흔들리는 순간? 그때부터 자극의 연쇄에 딱 걸려든다. 퇴근 후 멋지게 글도 쓰고, 운동도 좀 하겠다며 의지 뽐내던 나. 그런데 소파라는 놈이 문제다. 한 번 앉으면? 얘가 마치 나를 사랑하는 척하며 껴안는다. 소파의 품은 악마적이다. 결국 나는 소파의 포로가 되어 TV 켜고 폰으로 온갖 쓸데없는 정보를 주워 담기 시작한다. (우리는 정보도 자극으로 느낀다. 왜? 정보는 생존확률을 올리기 때문이다. 뇌는 원래 이따위로 진화했다. 그게 문제다.) 그렇게 자극을 퍼먹으면 뇌는 더 큰 자극을 요구한다. 슬슬 배고프지? 이제 배달앱을 켜게 된다. 치킨, 떡볶이, 피자… 손가락은 이미 신명을 얻었다. 배가 차면? 그다음은? 그냥 드러누워 인간 대자로 변신하는 거다.
이게 바로 자극 - 무기력 - 더 큰 자극이라는 악습의 굴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 함정에 빠진다. 근데 중요한 건 거기서 멈출 줄 아느냐다. 세상은 당신을 흔들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게 통제당하는 허수아비가 될 뿐이다. (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다. 물론, 총칼 들고 싸우자는 거 아니다. 나는 정신의 투쟁을 말한다.)
통제하는 삶을 통해 보이는 신.
나를 통제해야 하는 이유? 금욕주의? 결국 자존감을 제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브런치 북의 제목이 세상과 나의 경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내 안의 게으름, 욕망, 나약함. 얘들을 꺾는 순간 느껴지는 승리감. 이것이 내 자존감의 원천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신은 더 이상 내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다. 반대로 나를 구원해 줄 신이 되어서 다가온다. 바로 자'신'말이다. (무신론자인가? 그래, 세상에 신이 없으면 만들어라. 당신은 자신의 신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널 구하러 오지 않는다. 구원은 자'신' 밖에 못해준다.)
세상은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한다. 그게 유일한 자유다. 나는 세상의 경계에 흔들리던 사람이었다. 그 경계는 이제 내가 긋는다. 내 통제가 내 삶의 경계선이다.
세상과 나의 경계 -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