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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산후우울증은 처음이지

불안도 육아의 일부다

by 수하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아이 친구의 엄마가 터울 큰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퇴소했다. 이제 막 전쟁 같은 신생아 육아를 다시 시작했을 그녀를 떠올리니, 우스갯소리처럼 '전생 같다'고만 여겨졌던 내 아이의 신생아 시절이 겹쳐 떠올랐다.


동시에 나에게는 처음이었던, 짧지만 강렬했던 산후우울증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약 50일간의 시간은 엄마가 처음이었던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아이가 커갈수록 지난 시절 아이의 모습이 그립고, 한 번쯤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신생아 시절만큼은 글쎄, 망설이게 된다.




‘조리원 천국'이라 불리는 시간을 보내고(말이 천국이지, 사실 출산 직후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까. 다만 조리원 밖의 현실이 더 고되기에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호기롭게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산후도우미를 다음 날부터 오라고 한 결정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비로소 실감한 것이다. 대개는 경험이 있는 양가 어머니 중 누군가 곁을 지켜주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런 지원 없이 오롯이 홀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보다 더 불안해하는 남편과 울기만 하는 아이, 그리고 완전히 무장 해제된 내가 집 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진정한 부모로서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른 오후 집에 도착해 다음 날 오전 산후도우미가 올 때까지,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조리원에서 잘 웃고, 잘 자던 아이는 어디로 가고 집에 오자마자 울기만 하고 도무지 잠깐의 깊은 잠도 자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초보 엄마인 내가 아이를 어딘가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너무 작고 여린 생명이 내 곁에서 울고만 있으니 밥이 넘어가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나니,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덮쳐왔다. 설마 매일이 이런 걸까?(결과적으로 50일까지는 거의 매일 그랬다) 내가 이 아이를 정말 안전하게 키울 수 있을까? 먹지도 자지도 못한 데다 불안감까지 더해진 것은 분명 요동치는 호르몬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도착한 산후도우미는 딸 같은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이제 괜찮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쩌면 내게 필요했던 건 먼저 겪어본 누군가의 그 말 한마디와 따뜻한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리는 봉두난발을 하고, 퉁퉁 부은 얼굴로 수유를 하던 내 모습이 같은 엄마로서 또는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마침 멀리 떨어져 사는 친언니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나는 여러 가지 감정으로 뒤섞여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걱정이 된 언니는 내가 가장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팔십을 넘긴 할머니가 당장 우리 집에 오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산후도우미와 할머니의 도움으로 나는 그 반나절의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는 내 아이가 50일이 될 때까지 내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 주셨고, 엄마가 처음인 나를 한 번 더 길러내셨다. 그리고 떠날 때 끝내 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그날,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그 감사함에 북받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아이만큼은 내가 야무지게 키워내리라. 짧지만 강렬했던 내 산후우울증은 그렇게 여러 고마운 마음들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 불안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낳기 전 살아오면서 마주한 불안은 내가 직접 부딪히면서 해소하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내 뱃속에 생긴 순간부터 시작된 불안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부모로서의 불안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계속해서 새로운 과제를 마주한다. 더 이상 우울한 감정은 아니지만, 아이가 성장할수록 나의 불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속도를 내는 듯하다. 나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막막함이 동반된다. 내품의 아이가 차근차근 독립해 가는 과정을 수용하면서 그에 따른 불안도 함께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아이를 키우듯이 어쩌면 아이는 그렇게, 다시 나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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