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해방, 안전과 불안 사이
엄마가 되고 뉴스를 보는 것이 무서워졌다. 뉴스가 아니더라도 어린이와 관련된 사건사고를 다룬 프로그램은 예고편조차 보기 힘들 정도다. ‘초등학생 여아를 성추행하고 유괴를 시도한 70대 구속’, ‘하교하던 초등학생 후진 청소차에 치여 참변’. 삶에 적당한 불안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데, 요즘은 적당히 불안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엄마, 주말에 A랑 B랑 만나서 리코더 연습하기로 했어."
지난 주말, 아이가 스스로 정한 약속만 두 건이 있었다. 주말마다 일정이 많았던지라, 어렵게 잡았을 친구들과의 약속을 이번에는 꼭 지켜주고 싶었다. 하루는 작년에 전학 간 친한 친구를 만나 키즈카페-팬시용품점-카페 투어를 한다고 했고, 다른 하루는 반 친구들과 리코더 연습을 해야 한단다. 내 눈엔 초등학교 저학년의 티를 이제 막 벗은,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인데 개인적인 약속이 하나둘 늘고 있다. 아직은 엄마의 동의를 구하거나 함께 하는 단계다.
아이가 더 어릴 땐, 친구의 엄마가 내 친구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렇게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소중한 인연도 많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아이 친구의 엄마까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아이 친구의 엄마라고 해서 끊임없이 관계를 넓혀 가는 것은 내게도 버거운 일이고, 이쯤 되면 아이들도 바쁘고 혼자 다니는 아이도 많아서 좀처럼 마주칠 기회도 없다.
요즘은 아이를 약속 장소에 데려다주고, 나는 도서관에 들르거나 쇼핑을 하고 차를 마시며 자유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아이 친구 엄마와도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이런 저련 이야기를 나눈다.
"전학을 가서도 서로 그리워하고 시간을 내어 만나는 걸 보니, 둘이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런데 아이들은 우리를 언제까지 끼워줄까요. 그렇다고 아이들끼리 만나기엔 아직 좀 이른 것 같고요."
이런 종류의 대화를 하며 몇 번이 오게 될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했다.
문제는 다음 날, 어떤 보호자도 동행하지 않는 듯한 리코더연습이었다. 아이 셋이서 합주 연습을 하겠다며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시험도 아닌데 굳이 만나서까지 연습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실은 주말에 서로 얼굴도 보고 싶고 놀고 싶은 눈치였다. 몇 번이나 내 아이만 못 나가게 했던 터라 이번에는 허락했지만, 아직 아이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게 하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공공장소에서 리코더 연습이라니, 혹시 민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근처에서 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일일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아이들은 만나자마자 꽤 정직하게 리코더 연습을 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속에서 리코더를 불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엄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따라나서긴 했지만, 실은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시절을 두 눈에 담아두는 순간이 좋다. 역시나 연습은 잠시였고 아이들은 놀 궁리를 했다. 집에서 내려다 보이는 놀이터에 아이스크림을 쥐어 주고 먼저 집으로 왔다.
적당하게 불안하기 어려운 이 세상 속에서 각자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환경도, 과거의 경험도 다르기에, 아이의 안전과 관련된 태도는 각자 부모의 권한이자 책임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왜 아직도 아이와 함께 등교를 하는지, 왜 아직도 아이를 혼자 두지 않는지와 같은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도, 대비하는 사람도, 끝내 책임져야 할 사람도 다른 누군가는 아니다. 이른바 '초품아' 지역(초등학교를 단지가 둘러싸고 있어 등하교 시 차 없는 거리가 가능한 지역)에 사는 엄마가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엄마에게 아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등교를 같이 하냐고 말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만 열 살, 언제나 엄마와 함께였던 '엄마 껌딱지'가 슬슬 이별을 고하고, 나는 아이의 독립과 나의 해방, 안전과 불안 사이에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이는 점점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지만, 엄마는 관여하고 싶은 것도, 걱정되는 것도 점점 많아진다. 조만간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라는 말을 듣게 될 테고, 곧 "엄마는 몰라도 돼"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엄마도 알려 달라고 조르면서, 때론 알아도 모른 척하면서 너의 소중한 시절을 안전하게 함께 하고 싶다.
그 모든 길 위에서, 모든 아이들이 안전하기를 간절히 신께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