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돌봄의 역사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정기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 마주한 반가운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애데렐라'라는 말이 생겼을까.
오랜만에 혼자 또는 누군가와 차 한잔 하는 시간도 좋았고, 차분히 집안을 정리하는 시간도 좋았지만, 오랜 시간 워커홀릭으로 살아온 나는 ‘일'에 대한 고민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막상 육아를 시작하니 출산 전 막연하게 고민했던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문제가 훨씬 더 진지하게 다가왔다. 고민은 치열했고 방향은 분명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서서히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아이의 돌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혹은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계획했고, 실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지나고 보니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환경은 드물고, 보이지 않는 희생과 포기가 따르는 법이다. 하지만 뜻이 있다면 반드시 길이 있다. 마음이 깊으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조직생활을 한다는 건 길든 짧든 아이에게 돌봄이 필요함을 의미했고, 아이에게는 총 세 번의 돌봄 선생님, 혹은 돌봄 이모가 있었다.
첫 번째 돌봄 선생님과의 시간은 짧았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나는 오랜만에 9 to 6 근무를 하게 되었고 아무리 서둘러도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아이의 유치원 하원 시간은 오후 5시였고, 약 두 시간 정도 돌봄이 필요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오히려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아이돌보미 사업을 알게 되어 신청했다. 맞벌이라 비용면에서 큰 혜택은 받지 못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예약만 하면 돌봄 인력이 배정된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했다. 예상컨대 기관 운영면에서의 효율적인 동선과 인건비 이슈로 아이가 겨우 적응할 만하면 돌봄 선생님이 바뀌는 것이었다. 아이가 이제 막 마음을 연 선생님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아이에게 또다시 적응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던 중, 현재 돌봄을 맡고 있던 선생님의 스케줄 공백으로 인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고, 더는 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나는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한 달간 단축 근무를 하며 다시 돌봄에 대한 준비를 했다. 내가 회사를 포기하지 않은 건지, 회사가 나를 포기하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다.
두 번째 돌봄 '이모'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며 아이 친구를 돌본 적이 있는 분이었고, 친숙하고 믿음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움을 청했는데, 약간의 고민 끝에 아이를 돌봐주시겠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라 하루 두 시간 정도 지내기에도 서로 편한 조건이었다. 나로서는 검증된 분이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아이도 익숙한 이모에게 금방 잘 적응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모 어머니의 지병이 악화되어 당분간 돌봐드려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약간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날 퇴근 한 나를 붙잡고 이모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 너무 미안해요. 그런데 지금 나 아니면 아무도 엄마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이 시간이 지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요.”
이모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그 어머니도 딸을 둔 엄마였다. 우리는 모두 서로 가장 소중한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였다. 당장은 막막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후회 없이 어머니 곁에 있으시라고 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었다. 다행히 이모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믿음직한 지인을 소개해 주셨고, 그 분과는 2년 가까이 함께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나와 아이를 위해 대안까지 마련해 두신 것이다. 이모와는 내가 1년간 육아휴직을 하면서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휴직이 시작되고, 두 분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두 분은 지금의 제 삶에 가장 큰 도움을 주셨다고, 평생 기억하겠다고.'
아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만난 세 번째 이모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복직 당시 아이는 2학년이었다. 아직은 더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보내는 게 망설여지기도 하고 아이의 혼자 있는 시간도 조금만 더 미루고 싶었다. 이번에도 역시, 딱 두 시간 정도가 비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민간 업체를 통한 돌봄을 알아보았고 신중히 이력을 살폈다. 나는 이력서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한 분께 직접 연락을 드렸고, 면접이 성사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오래 운영하다 코로나로 폐업한 뒤 휴식을 취하고 계신 분이었다. 1년 남짓, 그녀의 따뜻한 돌봄 속에서 내 아이는 다시 한번 자라났다.
학년이 올라가고 학원 시간이 늦어지며 아이의 일정은 바빠졌고, 그렇게 우리 집 ‘돌봄의 역사'는 어느덧 막을 내렸다. 이젠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이 생겨도 각자 어느 정도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내 눈엔 아이가 어리게만 보이고, 세상은 나날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만, 결국은 나도 아이도 조금씩 독립을 배워나가야 한다. 지금은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 나가는 일이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지, 아이가 혼자 오는 것이 불안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가 있다.
크게 세 번의 돌봄을 거치며, 나는 아이의 조금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는 돌봄 선생님이나 이모들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다. 이를테면 자기 물건을 만지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든가,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든가, 알림장 도장은 꼭 엄마가 찍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아무리 늦더라도 저녁은 꼭 엄마와 먹고 싶어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와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이는 '엄마를 대신하는 자리'에 대한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엄마의 자리를 대체한 존재에 대한 부정' 같은 게 아니었을까.
오늘도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와 저녁을 함께 먹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