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어쩌면 지금도
“엄마, 나 먼저 출발할게.”
이른 아침,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아이가 핸드폰을 뒤적이더니 친구와 만날 시간을 정하고 등굣길에 나섰다. 요즘은 내 출근 시간이 조금 늦어져 아이가 먼저 집을 나선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아이가 조금 늦게 출발하고, 내가 조금 일찍 나서서 함께 갈 수도 있지만, 아이는 늘 먼저 갈 준비를 마친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한결같이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도 도서관에 들르거나, 친구를 만나 같이 가겠다며 서둘러 신발을 신는다.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며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저 멀리 횡단보도 앞에서 친구를 만나 신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좋은 의미로, 이제 아이의 등굣길에 엄마의 도움은 필요 없어 보였다. 출근 시간이 다시 빨라지면 다시 함께 등교하겠지만, 어쩐지 이런 순간들도 오래 남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나고 보면, 마지막인 줄 몰랐는데 마지막이었구나 깨닫는 일이 많아진다. 심각하게 생각하자면, 지난달 할머니와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고, 오늘 아침 남편과의 인사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마지막'이라 함은, 다시 할 수 있지만, 그 시절이 지나가버렸음을 뜻하기로 한다. 삶에는 그런 장면들이 늘 있지만, 아이와의 순간은 유독 더 그립게만 느껴진다.
아이가 좀 더 어릴 때 아빠와 목욕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말이 목욕이지, 좁은 욕조 안에서 물놀이를 하고 잠수 놀이를 하며 첨벙첨벙 족히 한 시간은 놀았다. 꽤 커서까지 이어진 시간이었는데, 아이의 몸집이 커져 욕조가 좁아지고, 아빠와 성별도 달라서인지 어느 순간 더 이상 그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오늘까지만 같이 목욕하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당신과 아이가 함께 씻었던 그날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네”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마지막인 줄 몰랐기에 덜 아쉽고, 덜 슬펐다. 지금도 긴 머리 때문에 혹은 개운하게 씻기 위해 내가 종종 도움을 주긴 하지만, 이제는 아이가 혼자 씻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아이가 어릴 때 자장가처럼 듣던 동화 오디오가 있었다. 나긋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였는데, 들으며 잠드는 것을 좋아해서 거의 모든 회차를 들었다. 다시 듣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가버린 것 같다. 이야기 선생님 목소리를 따라 하며 내 얼굴을 쓰다듬던 아이의 작은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이미 오래전에 마지막이 지나가버렸음을 깨닫는 순간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아기띠를 하고 외출했던 날, 마지막으로 기저귀를 채워줬던 날, 마지막으로 밥을 떠먹여 줬던 날, 마지막으로 손수 이를 닦아줬던 날, 마지막으로 유치원 소풍을 갔던 날, 마지막으로 엄마의 음성으로 책을 읽어 줬던 날(요즘은 혼자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 생각해 보면 그런 마지막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이제 곧 다가올 마지막도 있다. 마지막으로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는 날, 마지막으로 오늘 입을 옷과 머리띠를 골라주는 날, 마지막으로 머리를 묶어주는 날, 마지막으로 알림장에 도장을 찍어주는 날. 마지막으로 보호자를 자처하며 함께 친구를 만나는 날, 마지막으로 엄마와 함께 자겠다고 조르는 날.
아직까지 아이는 유난히 어린아이 같은 말투를 쓴다.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것 일수도, 편한 사람들에게만 쓰는 친근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괜히 어디 가서 약해 보일까 봐, 그런 말투 쓰지 말라고 다그치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그 말투가 사라질 것을 안다. 그때가 오면, 왜 그렇게 성급히 말투를 고치라고 했을까 후회할 텐데도 지금 닥치지 않으니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엄마 품에 안기길 좋아하는 아이는 안아달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내 기분에 따라 안아주기도 하고, 피곤하다거나 덥다며 귀찮아하기도 한다. 언제나 나만을 바라보고 내 도움을 필요로 하며 나와 함께 모든 것을 함께 할 것 같던 아이가 내 품을 떠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좀 더 귀중히 여겨야겠다고 또 다짐한다.
오늘도 문득 느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마지막인 줄 모르고 지나가는 중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