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p9.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p63.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르는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란 파헤치고 들쑤시는 방식으로만 좁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p101.
이른바 '읽어낸' 거야. 그자의 무언가를. 그것은 감정이기도 하고 사고이기도 하면서, 단순 회상, 상상, 앞으로의 계획,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합한 무언가였고, 거기에 나는 명쾌한 이름을 붙이기가 지금도 어려워.
p166.
그보다 인간에게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p184.
"그건 이해가 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야. 뭐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서 매일같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터에서 녹초가 되어 침대로 돌아와선 요가 명상 사운드를 들으며 잠을 청하지.
p244.
"척하는 데에는 같이 척해주는 게 예의지."
p302.
하늘과 땅 같은 자연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딱히 어진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따위 만물의 입장에서는 짚으로 엮음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야.
p329.
"그것이 지금이라면 앞으로는 오지 않을 테고, 다음번이 아니라면 지금 오겠지요."
p344.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