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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Apr 22. 2024

퇴사자에게도 '회사놀이'가 필요하다

퇴사 54일차의 기록

책상 하나를 빌렸다. 친구가 경영하는 회사의 사무실에 있는 책상이다. 나는 은평구 응암동에 사는데, 이 책상은 강서구 마곡동에 있다. 굳이 멀리 있는 책상을 빌린 이유는... 회사놀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였다. 


기자로 일했고 동시에 몇몇 매체에 정기적으로 원고를 기고하며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했던 나에게는 여전히 ‘마감’이 최우선이다. 어떤 일이든 마감을 약속한 후 진행하는 편이고, 약속한 마감보다 빨리 일을 끝낼 때 성취를 느낀다. 이게 책임감이 투철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책임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퇴사 이후에도 ‘마감’을 약속한 일은 마감을 맞추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간에 마감은 맞춘다. 문제는 마감이 없는 일이다. 마감을 정해놓았어도, 나 혼자 정해놓았을 뿐,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은 그런 일들이다. 


퇴사 전에 내가 다짐한 건,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글이 되었든, 유튜브 영상이 되었든, 무엇이든. 나의 생산성을 최대치로 폭발시켜 보는 게 목표였다. 그것으로 브런치와 블로그, 유튜브 등의 채널을 채우고 그렇게 나온 성과로 또 다른 것들을 생산해 보고 싶었다. 그것이 돈이 되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다짐은 다짐으로 그치는 시간이 많아졌다. 당장 돈이 되지 않고, 당장 마감이 없는 일은 미루고 미루었다. 결국 ‘모드의 전환’을 위해서는 책상이 필요했다. 내 책상이 아니고, 남의 책상이어야만 했다.


친구 C는 이전에도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했었다. 친구 회사의 상황이 좋았다면, 내가 빌릴 수 있는 책상도 없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상부상조인 셈이다. 친구의 사무실에 갔고, 그곳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침 회사 전체의 창고 정리를 하는 날이라 길래, 그 일도 도왔다. 함께 커피를 마셨고, 밥도 먹었다. 책상에 더해 동료까지 생긴 기분이었다.

다시 책상에 앉아서 물을 한 잔 마시는데, 예전에 읽어본 '극락 컴퍼니'(하라 고이치)라는 일본 소설이 떠올랐다. 이 책 또한 평생을 회사에 매진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은퇴 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동네의 다른 은퇴자들과 회사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다. 회사 생활에 젖을 대로 젖은 그들은 '회사의 양식미'가 주는 안정감을 잊지 못한다. 나는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회사에 충성하며 살았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또한 '회사의 양식미'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지하철을 타는 출근의 양식미.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전날 야구 경기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월급루팡의 양식미. 어떻게든 퇴근 시간 전에 일을 끝내놓는 칼퇴근의 양식미 등등. 친구 덕분에 어느 정도의 양식미를 갖추었으니, 이제 근면성실하게 회사놀이를 하면 될 것 같다. 오늘은 출근 4일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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