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관광객이 되었다(와아 처음이다)
겨우 자리를 구한 투어에 참가했다. 젊은 싱가포르 여자(국적은 싱가포르인데 인종적으로는 인도와 말레이시아가 섞인 것 같고 결혼해서 이제는 호주 사람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나이 지긋한 홍콩 아줌마 두 명(괜히 반갑다고 홍콩에 대해서 막 아는 척했다), 오리건에서 온 미국 부부(입양한 자식 두 명이 다 한국 사람이라고 나를 무척 반가워했다. 광대뼈(Cheek bone) 보며 우리 딸도 이렇게 생겼다고 - 그래 나 광대부자다ㅠㅠ) 이렇게 6명이 밴에 타고 떠났다.
경치는 진짜 이제까지 다녀 본 세계 어느 곳에 비해서도 최고인데 아 ㅅㅂ 정말 추워도 너무너무 추웠다. 밖으로 드러난 모든 살이 다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볼 건 많았는데 사진도 많이 못 찍었다.
스카이 섬에 가면 꼭 둘러보는 대표적인 관광지는 이런 곳들이다.
스카이 섬을 대표하는 바위 기둥 랜드마크.
멀리서도 눈에 띄는 뾰족한 바위 하나가 서 있어서 사진 찍기 제일 좋다.
산 전체가 무너지고 접힌 지형 자체가 관광지인 곳.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재해 현장 같아 보인다.
동글동글한 언덕들이 모여 있는 미니어처 세계 같은 장소. 인공 같아 보이지만 천연 지형이다.
여기서 정말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사진도 못 찍었다. 여기 가서 보셈.
절벽의 수직 주상절리가 스코틀랜드 킬트 주름처럼 보여서 붙은 이름.
투명한 물빛의 폭포와 웅덩이들이 이어진 계곡.
날씨 좋을 땐 물색이 미친 듯이 예쁘다.
용감한 사람들은 수영도 하는데 물은 죽도록 차갑다.
가는 길마저도 비현실적으로 웅장하다.
사진 여기 가면 나옴 진짜 이쁨
싱가포르 여자는 진짜 어찌 보면 자유로운 영혼, 어찌 보면 진상이었다. 페어리 풀은 투어의 마지막 코스였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다들 좀 걸어가다가 페어리 풀까지 못 가고 도중에 돌아와야만 했다. 근데 이 여자만 끝까지 가서 페어리 풀을 보고 사진 찍는다고 염병 떨다 물에 빠져갖고 쫄딱 젖어서 늦게 돌아왔다. 다들 이 여자 안 와서 밴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기다렸다. 어차피 기다릴 거 우리도 그냥 페어리 풀까지 보고 올걸. 누군 페어리 풀 보고 싶지 않았나...
아무튼, 그런 추운 날씨에도 수영복을 갖고 와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
카페테리아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을 때 미국 부부의 대화.
아저씨 : (카운터에 가서 뭔가 물어보는 다른 관광객을 보며) 저바저바 저바바, 커피 리필을 요청하고 있어. 분명히 미국인이야!
아줌마 : 오 진짜네. 여보 우리 캐나다 사람인척 합시다.
싱가포르 여자는 스카이 섬 중심인 포트리에서 버스로 삼십 분이나 걸리는 섬의 북쪽 끝 우이그(Uig)라는 마을에 묵고 있었다. 우이그는 외(Outer) 헤브리디즈로 가는 배가 다니는 곳이다. 나도 이 동네에 가보고 싶었지만 숙소가 없어서 가지 못했다.
스카이 섬에서는 어디를 가는 버스를 타도 포트리를 지나간다. 싱가포르는 매일매일 같은 버스를 아침저녁으로 탔다. 어느 명승지의 언덕에 빨빨거리고 올라갔다가 비를 쫄딱 맞은 싱가포르는 그날도 포트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서 무지 추웠다. 매일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버스 기사 아저씨는 싱가포르를 딱하게 여겨 포트리로 가는 길에 자기 집으로 버스를 몰고 가서(다른 승객들이 없었나 보다) 자기 집 열쇠를 주며 거기서 씻고 말리고 따뜻한 차도 한 잔 마시게 해 주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분명히 싱가포르는 다음 날 뉴스에 근처 저수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착한 기사 아저씨네 집문서가 사라졌거나. 그전에 애초에 아저씨가 열쇠를 주지 않았거나, 걔도 아저씨네 집에 용감히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이건 내가 본 건데, 버스를 타고 포트리에서 카보스트(Carbost) 마을로 가는 도중에 승객 중 어떤 할아버지가 버스 기사한테 뭔가 부탁하자 기사 아저씨가 버스를 세워 주었다. 할아버지는 잠깐 내려서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왜 가다 아무 데서나 서냐고 지랄하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더 신기했던 것은 이 동네의 숙소 예약 방식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이 동네의 숙소를 이메일이나 전화로 예약했다. 그런데 보증금을 부친다거나 신용카드 번호를 미리 받아놓는다거나 하는 절차가 전혀 없었다(외국인이라 송금도 못했겠지만). 말 그대로 그냥 너 믿고 예약받아주는 것이었다.
나는 B&B 주인에게 "만약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혹은 고의로 예약해 놓고 안 오면 어떡해?"라고 물었다. 주인은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린 그냥 믿고 예약받아."라고 대답했다. 성수기에 방이 없어서 난리인 그 스카이 섬에서 말이다. 2026년 아직도 그렇게 하는지 어쩌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은 10년 전인 2016년에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들지 않는가?
지금도 여전히 살만한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좋아하던 곳이 변하면 너무 슬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