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깃발이 가보로 내려오는 던베건 성

세 번째 재앙 대비 아껴두는 중

by 마봉 드 포레

맥클리오드 일족의 성, 던베건 성

포트리에서 10:15에 출발하는 섬 버스를 타고 던베건 성을 구경하러 갔다. 이 성은 맥클리오드(Macleod) 일족의 족장이 대대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관광지이다.


7월 말에 낮기온 14도, 간간이 부슬비가 내렸다. 셔터를 누르는 손이 시려서 호호 불며 사진을 찍었다(핸드폰만 갖고 다닌 게 아니라 카메라도 가지고 다녔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날씨만 좀 따뜻하면 얼마나 좋았을까ㅜㅜ 물개 보는 투어도 있는데(스카이 섬에는 여기저기 물개가 많이 산다) 버스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다.


여기서 잠깐 스코틀랜드의 클랜에 대해서 알아보자. 스코틀랜드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부족의 집단이고 이걸 알아야 우리도 맥도널드를 사 먹을 수 있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클랜(Clan)이란?

● 같은 조상에서 나온 사람들 즉 부족이다.

● 같은 성씨(Surname)를 공유하거나, 그 아래에 속한다.

● 특정 지역(땅)을 중심으로 같이 살던 사람들이다.

● 전쟁 나면 같이 싸우고, 같이 책임지는 집단

즉 가족 + 부족 + 지역 자치 세력 = 클랜


클랜의 기본 구조

● 족장(Clan Chief): 가문의 대표, 군사 리더

● 클랜원(Clan Members): 친척 + 보호받는 사람들(굳이 피가 섞일 필요는 없음)

● 클랜 땅(Territory): 성(Castle), 마을, 산, 호수까지 포함


스코틀랜드는 산이 많고, 중앙정부의 힘이 약하며 외적 침입도 많고 내전도 많아 항상 국가보다 내 가족, 내 부족이 우선이었다. 즉 클랜은 군대이자, 복지 시스템이자, 신분이자 생존의 장치였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킬트 패턴도 클랜별로 다 달랐다. 스코틀랜드의 타탄 샵에 가면 가문 이름별로 타탄이 쭉 걸려 있는데, 교복에서 많이 보던 무늬ㅜㅜ마저 있을 정도로 이젠 아무 데서나 다 갖다 쓰는 것 같지만 예전에는 그 무늬를 보고 아 너 맥클리오드네 애구나? 하고 알아보는 신분증이었다. 지금이야 뭐 누구든 원하는 대로 사 입을 수 있지만...


지금이야 뭐 스코틀랜드도 인도계 동유럽계 중국계 이민자들로 넘쳐나고, 글로벌 시대에 클랜 같은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아직도 성씨, 문장, 전통, 모임 그리고 족장 직위가 살아 있으며(우리도 종갓집, 종손 등이 아직 있듯이), OO 클랜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도 아직 있다고 한다.


맥클리오드와 스코틀랜드 계열의 성씨들

스카이 섬에서 가장 유명한 클랜은 섬 서쪽과 북쪽을 본거지로 한 맥클리오드지만, 스카이 섬은 맥클리오드만의 섬은 아니었다. 스카이 섬 남쪽의 슬리트(Sleat) 지역의 맥도널드(MacDonald - 우리가 아는 패스트푸드의 그 맥도널드 맞지만 스카이 섬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냥 미국으로 건너간 맥도널드 창업주가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후손이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는 더 넓은 세력권을 가진 클랜이었고 중세 하이랜드의 초강력 클랜으로 '섬의 군주(Lord of the isles)'까지 올라간 집안이었다. 얘네들은 스카이 섬 남부부터 헤브리디즈 전역을 다 다스렸고 전쟁, 정치, 반란, 몰락까지 다 겪은 서사 끝판왕 가문이다.


그 이외에 맥키넌(MacKinnon), 맥닐(MacNeil), 맥퀸(MacQueen) 등 중소 클랜들도 지역별로 나뉘어 살았다.


그렇다면 Mac은 무엇일까? '~의 아들(son of)'이라는 뜻이다. 즉 맥도널드는 도널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뭐 너무 흔해빠져서 놀랍지도 않은 맥켄지, 맥그리거(이완 맥그리거 다들 아실 거고) 등등의 성씨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성씨이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Mac이 Mc으로 축약되기도 했지만 같은 애들이다. 비슷한 것으로 아일랜드의 O'가 있다. 이건 '~의 아들'이 아니라 '~의 후손(descendent of)'의 의미라 약간 다르다. 대표적인 성씨로 오브라이언(O'Brien), 오닐(O'Neil) 등등이 있다. 이 성씨 갖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은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북유럽으로 가보면 이쪽이 더 원조다. '~son', '~sen'과 같은 접미사들은 다 '~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아이슬란드만 빼고는 남녀 다 공통으로 가지는 성들이다. 대표적인 것들로 이런 것들이 있다.

Andersson = 안데르스의 아들

Johansson = 요한의 아들

Eriksen = 에릭의 아들


아이슬란드는 아예 남자와 여자 성씨가 다르다. 왜냐면 남자는 '~son', 여자는 '-dottir'를 붙이기 때문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도 예전(고대)에는 이런 방식으로 했었는데 지금은 고정 성씨를 갖는 것으로 굳어졌고, 아이슬란드만은 여전히 고대 방식으로 성씨 개념 없이 이렇게 쓰고 있다.

Jónsdóttir = 욘의 딸

Ólafsdóttir = 올라프의 딸

이러다 보니 형제간에도 성이 다르다. 딸이랑 아들이랑 성이 달라지니까. 이름 자체가 족보다.


아 그래서 던베건 성 어땠냐고

아 얘기하다 보니까 또 딴 데로 샜다. 그래 던베건 성 갔다. 성에 가면 초상화와 같이 족장 계보가 전시되어 있는데, 항상 장남이 족장을 한 것도 아니고 남자만 한 것도 아니었다. 차남이나 딸이 한 적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1930년 얼마 안 되는 거주민들이 모두 대피한 이후로 현재까지 임시 거주하는 학자와 군 관계자들 이외에는 거주민이 없는 세인트 킬다(St. Kilda) 섬 역시 얘네 땅이었다. 이 세인트 킬다 섬은 우리나라 독도처럼 본토, 그리고 아우터 헤브리디즈에서조차도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데, 1차 대전 이후 전염병과 기근 기타 등등으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전 주민(이라고 해봐야 몇 십 명) 전원이 스코틀랜드 본토로 이주했다. 영국이면서도 영국사람들도 잘 모르는 이 외딴섬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글을 파서 쓰도록 하겠다.


성은 이렇게 생겼다.

던베건 성 입구. 회색+베이지색 돌로 된 투박하게 생긴 성이다. 외양이 문제가 아니라 따뜻해야만 했겠지 싶다.
정원과 카페가 있는 성의 안뜰. 둥근 전망탑이 보인다(진짜 성은 이게 맛이지!)
성 앞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다본 던베건 성. 호수에 성이 비친다. 운 좋으면 이 앞에 물개도 놀러 온다는데 난 못 봄.
역시 호수 맞은편에서 본 던베건 성. 분위기 죽이게 찍어놨다. 뭐라도 나오게 생겼다(이상한 거 말고 요정 등등).

이렇게 추운 동네에서 어떻게 이런 정원이 유지될까 싶을 정도로 정원도 정말 아름답다. 정원 사진도 보고 가자.

정원 가는 길 입구. 난 추워 죽겠는데 어떻게 이런 초록이 유지되는지 신기하다.
이건 너무나 하이랜드식 정원이다. 비바람에 강한 라벤더, 세이지, 알케밀라 몰리스(노란색 꽃), 제라늄(보라, 연보라), 크로코스미아(주황색). 기후에 강한 애들로만 꾸민 정원.


던베건 성의 전설, 요정의 깃발

이제 요정의 깃발 전설 얘기를 해야겠다. 이전에 내가 두 번이나 보러 갔었던 'Misty Island' 공연에서도 나왔던 내용이지만, 이 성에는 맥클리오드 일족의 가보로 보관 중인 '요정의 깃발(Fairy Flag)'이 있다. 요정의 깃발이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것 같은데 낡아빠진 천조각이고 항상 전시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난 못 봤다. 너무 해지고 낡아서 어쩌다가 전시한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 땐 없었다. 아니면 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전설은 동화체로 쓰겠다.

[ 던베건 성의 요정 깃발 이야기 ]

옛날 옛날, 스카이 섬의 던베건 성에는 무지무지 잘 생기고 똑똑한 맥클리오드 일족의 영주가 살고 있었어요. 못생기고 덜 떨어져도 지위가 높아서 잘 나갈 판에 잘 생기고 똑똑했으니 모든 여자들이 영주님을 보면 홀딱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영주님은 눈이 높아서 웬만한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았어요.


어느 날, 빛나는 일족, 즉 요정 나라의 공주가 우연히 영주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당장 결혼하려고 했어요. 인간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당연히 요정의 왕은 반대했어요. 요정은 영원히 살지만 인간은 금세 늙고 죽어버리니까요.


하지만 공주가 밤낮으로 울고불고하니까 요정의 왕은 하는 수 없이, 대신 '부르면 당장 돌아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해 주었어요. 섬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서 잔치가 벌어졌어요. 사람들은 밤낮으로 위스키를 마시며 춤을 추고 암튼 두 사람은 결혼해서 무지무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윽고 자알 생긴 아들이 태어났어요. 그런데 요정의 왕이 요정한테 이제 돌아오라고 요정 전령을 보낸 것이 아니겠어요? 구름 속에서부터 던베건 성의 높은 탑까지 요정 공주가 돌아오도록 빛나는 길이 열렸어요.


영주와 요정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동족의 부름을 받은 요정은 절대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떠나기 전 요정은 남겨놓고 가는 아들의 육아가 걱정이 되어 한 가지 당부를 했어요. 아이를 절대 혼자 냅두지 말 것, 그리고 절대 울리지 말라는 것이었어요(아니 어떻게 애기가 안 울어요? 나원참).


마누라가 가버리긴 했지만 영주네 집에 후손이 태어난지라 축하 연회가 열렸어요. 또 잔치가 벌어졌어요. 부인을 잃은 슬픔에 빠진 영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 안에는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모여 춤을 추고 먹고 마셨어요.


정작 이 날의 주인공인 어린 아기는 성 안의 요람에 뉘어져 시녀가 돌보고 있었어요. 젊은 시녀도 내려가서 춤을 추고 싶은데 애를 봐야 해서 갈 수가 없으니 발만 드릉드릉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음악이 너무 신나게 들려오는 바람에 시녀는 아기가 깨서 우는 것도 모르고 있었답니다.


떠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당부를 어겨? 아기가 서럽게 우는 소리는 요정의 나라까지 들려왔어요(그렇게까지 우는데 시녀는 어떻게 못 들었을까요?). 엄마인 요정의 공주는 당장 내려와서 아이를 달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요람을 금빛 천으로 둘러 주었어요.


이 금빛의 천은 맥클리오드 일족의 보물로 간직되어 아직도 던베건 성에 보관되어 있어요. 전설에 의하면 가문에 위기가 닥칠 때 이것을 깃대에 꽂아 세 번 흔들면 신비한 힘으로 위기를 세 번 넘길 수 있다고 해요. 이제까지 두 번 사용했기 때문에 인제 한 번 남았답니다. 아껴두는 중이래요.


1. 첫 번째 사용

요정 깃발을 받은 지 몇 대 후, 섬들의 군주이자 숙적이던 맥도널드네가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와 맥클리오드 일족은 군사가 삼분의 일로 줄어들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어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전멸할 것 같았어요. 절박한 심정으로 맥클리오드 영주는 요정의 깃발을 가장 높은 탑에 걸고 세 번 흔들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맥클리오드네 군사가 열 배로 불어나 보이게 되었어요. 군사를 충원한 것으로 착각한 맥도널드네는 안 되겠다고 퇴각하고 그 이후로 다시는 맥클리오드네를 침략하지 않았어요.


2. 두 번째 사용

그로부터 또 몇 대 후, 극심한 기근으로 모든 곡식과 가축이 다 죽어나가는 바람에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 모든 일족이 굶어 죽게 생기자 당대의 영주는 또 비통한 심정으로 깃발을 내걸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가축들이 왕튼튼해져서 겨울 내 모든 일족이 굶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제 한 번 남았어요. 부디 사용할 일 없기를 바라며 맥클리오드네는 소중히 깃발을 아껴놓고 있답니다. 2차 대전에 참가한 맥클리오드네 사람들은 요정의 깃발 사진을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있었고, 맥클리오드네 족장은 이 깃발을 잉글랜드로 보내서 독일군 침공을 막아주길 바라며 도버 해협에 내걸었다고 해요(그럼 나머지 한번 이미 쓴 거 아닌가? 게다가 독일군이 침공 안 한 것도 아니고... 던베건 성에만 걸어야 들어주나?). 암튼 아래는 제가 보지 못하는 바람에 찍어오지 못한 요정의 깃발 사진이에요. 모두 감상하세요.

던베건 성에 전시된 요정의 깃발. 사진출처 leannegallacher.medium.com (난 성에 갔는데 못 봤음)

☞ 우리도 집안에 뭐 대대로 내려오는 보자기 같은 거 없는지 부모님께 물어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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