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카이 섬 이야기도 끝입니다.
포트리를 떠나 브로드포드로 간 것은 거기 볼 게 있어서 간 게 아니라 그냥 방이 있는 데가 거기뿐이어서였다. 스카이 섬에서는 나름 교통의 중심지(?)로서 어딜 가든지 반드시 거치게 되는 길목에 있는 동네지만 브로드포드 자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서 버스 타고 탈리스커 투어를 갔다는 것 말고는 기억할 만한 것은 없다. 집과 B&B와 피시 앤 칩스를 파는 식당 한 개 정도가 있는 작은 동네와 그 앞의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사진이나 몇 장 찍었다. 마침 드물게도 해가 나서 사진이 그럴듯한 게 나왔다.
다음으로 메뚜기 뛰러 간 곳은 카일라킨(카일라~킨, 하고 '라'에 강세를 주어서 읽는다), 스카이 섬에서 마지막으로 묵은 곳이다. 여기에는 정말이지 더 아무것도 없었고 날씨도 지독했다. 너무 춥고, 비 오고 바람도 거셌다. 할 수 있는 건 잠시 밖에 나가서 비를 맞으며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돌아와 오들오들 떨며 잠이나 자는 것 말고는 없었다. 17세기인가 18세기부터 있었다는 엄청 오래된 호텔이었다. 카페트는 누덕누덕 해지고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도 깨끗해 보이지 않는 그런 호텔의 소공녀 세라나 살 것 같은 지붕 밑 방이었다. 천장에 머리 한 세 번 부딪쳤나.
비가 잠시 그쳤길래 밖에 나가 봤다. 초라한 버스 정류장이 하나, 그리고 펍이 하나 있었다. 펍 이름이 '킹 하콘 바(King Haakon Bar)'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고 하니, 이 볼 것 없는 동네에도 역사적인 사연이 하나 있다.
1263년, 노르웨이의 하콘 왕은 사상 최대의 함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에 쳐들어 오기 전, 어떻게 생긴 동네인가 좀 살피고 가기 위해 루이스(Lewis) 섬에서 라세이(Raasay) 만을 지나 카일라킨까지 몸소 행차하였다.
그런 다음 대함대는 라르그스(Largs) 전투에서 자기들 내부의 미스 커뮤니케이션 및 개떡 같은 날씨로 인해 아주 그냥 처참하게 대패하고 말았다. 스코틀랜드 군은 폭풍을 피했지만, 노르웨이 군은 폭풍에 배들이 죄다 침몰하고 그 와중에 공격까지 당해 참패했다. 하콘 왕은 너덜너덜 남은 몇 채 안 되는 배를 이끌고 겨우 도망쳐 노르웨이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오크니(Orkney) 섬에 내려, 바이킹의 위대한 사가를 낭독하게 하고 조상의 승리와 자신의 참패를 비교하며 수치심과 슬픔에 그만 죽고 말았다(우리말로 홧병이라고 한다).
이 전투를 승리를 이끈 알렉산더 3세는 후에 '까마귀 조련사(까마귀는 하콘 왕의 깃발을 상징)'라고 불리게 되었다.
카일라킨은 이 하콘 왕의 이름을 따서 '하콘의 해협(Kyle of Håko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왠지 여기 지나면서 기분 더러울 것 같은 이름이다. 근데 스코틀랜드 북쪽으로 올라갈 수록 바이킹의 흔적은 엄청 많다. 지리적으로 워낙 가까워서 심심하면 침략 받던 곳이라... 지명조차 바이킹식 이름인 데도 있고 아무튼 이 동네는 바이킹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이 카일라킨 역시 볼 건 일단 없고 스카이 섬과 스코틀랜드 본토의 카일 오브 로칼쉬(Kyle of Lochalsh)를 잇는 다리인 스카이 브리지(Skye Bridge)가 있는 곳이다. 1995년에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스카이 섬과 본토는 페리로만 왕복할 수 있었다.
스카이 섬과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을 감시하던 성(배가 지나가면 쇠사슬을 걸어 통행세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음)의 성터도 있다. 여기까지 걸어가 보려고 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온 다음이라 진창에 무릎까지 빠질 뻔해서 그냥 돌아왔다. 지나가던 사람이 내 운동화를 보더니 "네 신발로는 거기까지 못 간다."라며 방수되는 등산화 신으라고 말해 주었다.
막상 스카이 섬을 떠나려고 하니 정말 서운했다. 방만 더 구할 수 있었다면 더 오래 머물렀을 텐데... 차를 몰 수 있었다면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는데, 국제 운전면허증을 가져오긴 했지만 반대쪽 운전은 자신이 없어서 써먹지는 못했다. 실제로, 유럽 본토(우리나라와 같은 방향으로 운전)에서 배 타고 영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방향 헛갈려서 역주행하고 난리 난 모습을 여러 번 보긴 했다. 버스 투어 다닐 때도 기사 아저씨가 "앗시발 또 외국인! 앗시발 또 역주행!"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차가 별로 없는 동네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대혼란 환장파티 할 뻔했다.
게다가 날카로운 자갈이 많은 험한 도로다 보니 짱돌이 여기저기 튀겨서 차 하단 부품도 손상이 많이 된다고 한다. 망가져서 길 한가운데서 움직이지 못하는 관광객 차들도 많다는 설명이다. 관광철인 6-8월에는 스카이 섬에서는 은퇴한 자동차 정비사들까지 다 나서서 일을 해야 겨우 돌아간다고 했다(투어 기사 아저씨가 말해준 얘기들이다).
TMI 인데, 본토에서는 도로 표지판 순서가 영어>게일어인 반면 여기서는 게일어>영어 순서로 표기되어 있다.
유럽은 번호판을 보면 어느 나라 차인지 알 수 있다. 독일 프랑스는 기본이고 멀리 체코에서 온 차도 있었다. 대체 얼마나 멀리 운전해서 온 걸까. 심지어... 포르투갈이랑 스페인에서 오토바이로 왔다는 사람들도 봤다. 와... 미친 놈들... 차로 와도 한참인데 오토바이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배 나오고 대머리에 양팔에 모두 문신이 가득한(오토바이족들은 왜 다 이렇게 생겼을까?) 남쪽나라 오토바이족들이 한 군데 모여 담배를 피우며 포테이토칩(...)을 먹고 있는 광경을 보면 세계는 진정 하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Peace~).
(포르투갈에서 오토바이 타고 온 남자가 "다음번에는 그냥 비행기 타고 올래ㅜㅜ"라고 말한 건 안 비밀이다)
스카이 섬은 헤브리디즈 제도(Hebrides)에 속한다.
헤브리디즈 제도는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에 길게 늘어진 섬들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민치 해협(The Minch)을 사이에 두고 이너 헤브리디즈(Inner Hebrides)와 아우터 헤브리디즈(Outer Hebrides)로 나뉜다.
이너 헤브리디즈는 스코틀랜드 본토와 비교적 가까운 섬들로, 스카이 섬을 비롯해 멀(Mull), 주라(Jura), 라세이(Raasay) 등이 여기에 속한다. 거칠지만 여전히 인간의 생활과 교통이 이어지는 섬들이다.
아우터 헤브리디즈는 그보다 훨씬 바깥, 대서양 쪽에 놓인 섬들이다. 바람과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 곳, 고립감이 훨씬 강하다. 스카이 섬이 “험한 섬”이라면, 아우터 헤브리디즈는 “세상의 끝에 가까운 섬”에 가깝다.
나는 안타깝게도 55일이나 스코틀랜드에 있으면서 아우터 헤브리디즈에는 발도 디디지 못했다. 너무 게으르게 여행한 모양이다. 다시 갈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찍고 올 생각이다.
다음 화에는 이 세상의 끝에서도 더 끝, 세인트 킬다 섬(St. Kilda)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물론 내가 가본 곳은 아니다. 하지만 헤브리디즈 얘기까지 이왕 한 김에, 아주 끝장의 끝까지 가보고 다시 본토 얘기로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