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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아니, 이렇게 시간이 많을 줄 몰랐지(아님)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5월

02


서점원인 나는 나름 이 공간을 책임지고 있는 1인이고, 서점의 전반적인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에 이 공간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다. 지루할 틈 없이 뭐만 조금 하고 돌아서면 퇴근 시간이 코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ADHD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책갈피도 만들어야지 하면서 끄적이다가, 책도 입고해야지 하면서 검색하고, 1일 1인스타그램 게시물도 올려야지 하면서 SNS 관리도 한다. 사부작사부작 이란 단어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지금이다.


여전히 코 앞에 닥친 일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몇몇은 새치기도 하면서 계속 줄을 늘이고 있다. 바쁘다. 문제는 나만 바쁘다. 당장의 성과는 없으면서 뭔가를 계속하고 있다. 그 뭔가가 뭔지는 지금 당장은 모른다. 나중에도 모를 수 있다. 그 뭔가가 허상이 되어 놓쳐버린 풍선처럼 저 멀리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끔찍하다.

이렇게나 부족한 시간 속에서 이렇게나 시간이 많을 수가 있나 싶은 순간도 있다. 물론 물리적 시간이 많은 건 아니고 상대적 공백 같은 거다. 그러니까 손님이 없는 시간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 그럼에도 내심 이날이 올까 싶었는데 오고야 말았다. 내가 방심한 틈에, 덥석.


매출 0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업종이라면 일 매출 0원은 없을 것 같다. 서점 주변 공간들만 살펴봐도 그렇다. 산책하다 카페 인하프에서 커피 한 잔 마실 테고, 중고등학생들은 하굣길에 세븐일레븐에 들러 컵라면 한 그릇 먹을 테고, 저녁엔 이태리 맨션에서 파스타를 먹으며 데이트하는 커플이 하나쯤은 있을 거다. 반면 ‘오늘 당장 책을 읽어야 해’ 같은 절박함은 잘 없으니까.

돌이켜 보면 사실 난 많이 방심하고 있었다. 오픈 초기엔 지인들이 많이 오니까 매출 달력엔 ‘0’이 아닌 숫자가 나를 반겼다. 이건 허수가 분명한데도 모른 척했던 거다.

심지어 전날은 5월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오픈 전부터 손님이 들어오셔서 책을 구입해 가신 터라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도 몇몇 분이 서점을 방문했으나 서점에 있던 그 어떤 책도 이곳 밖을 나서지 못했다.


서점원이 아니라 작업실을 공유하는 사람 혹은 글을 쓰는 사람 등 다른 역할을 추가해야만 하는 시점이 왔다. 서점이지만 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맞음). 오픈 준비를 할 때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들이 간혹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어떤 공간이 생겨요? 라는 물음을 건네면 나는 서점이요 라고, 해맑게 대답했고 무언의 안타까운 눈빛을 받았다(반면 엄청나게 환영해주신 분도 있다. 근처 중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위기의식이 강하게 솟구쳤다. 내 속에서 자체 소멸했다고 느꼈던 생존 본능이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역시 인간의 본능은 위기의 순간에 피어난다. 소설 속 등장인물도,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도 다들 어떠한 사건 혹은 위기를 맞이한 후에야 각성한다는 전개를 보면 이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와, 나도 주인공이 되었다.


매출 달력에 찍혀있는 ‘0’이라는 숫자가 주는 강렬함이 말도 못 하게 커서 숫자 ‘0’은 곧 ‘무엇이든’ 해야 한다로 치환되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내일은 책 한 권만 판매해도 어제보다 나은 하루가 된다는 것. 긍정이 넘쳐흐르는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를 읊조리며 정신을 부여잡아 본다.


2025년 5월 7일 오픈 열흘 만에 마주한 현실




서점원의 문장과 책

: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읽는 소설 속 사건이나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이 태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월의 심술을, 현상의 변덕을 극복할 수가 있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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