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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엉덩이를 내어주는 사이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5월

03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누군가의 반려인간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좋아해 줘야 하는지 모른다. 길을 걷다 산책하는 강아지를 보면 내적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는 게 전부다. 다가가서 통성명하는 일 따위는 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도 강아지에게도.

그런 나의 인생에 정기적으로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강아지가 등장했다. 옆집 카페 인하프 사장님의 반려견 반이. 눈송이 같은 반이. 하얀 털복숭이에 검정콩 같은 눈과 코를 가진 아이.


첫 만남, 나를 본 반이는 엄청나게 짖었다.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반이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왔는데 마음의 상처가 있는 듯했다.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강아지만 좋아한다고. 다행히 사장님을 만나서 많이 건강해졌고, 패셔니스타고(나보다 옷 많고 잘 입음, 실제 옷장이 따로 있음), 엄청 똑똑하고, 강아지와 사람들 모두에게 듬뿍 사랑 받는 중이다.


오픈 전 환기를 위해 서점 문을 열어두면 출근길의 반이는 파워숄더의 퍼프 소매를 장착한 꽃무늬 원피스라든지, 우아한 블랙 땡땡이 원피스라든지, 파스텔 색조의 그린 스트라이프 의상으로 그녀만의 컬렉션을 선보이며 위풍당당한 기세로 등장해 멍멍 짖는다. 그러면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일단 내적 환호를 지르고 사진을 찍기 위해 얼른 반이 앞에 자리를 잡는다. 물론 사진은 그녀의 실물을 담아내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 여기 반이 좀 보세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어요. 하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 반이도 사장님의 품에서 벗어나면 바로 쫄보가 된다. 사장님이 서점에 반이만 놔두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그녀의 도도한 발걸음과 날카로운 눈빛은 사라지고, 아련함만이 남아 사장님이 떠난 자리를 좇는다. 내가 시선을 끌기 위해 ‘반이야’ 라고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그녀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저 유리문 너머 사장님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래도 반이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어느 날은 책방 문 앞에 깔아둔 코일 매트 위에 사뿐하게 올라서서 ‘나를 봐’ 하는 듯한 느낌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언젠가는 닫힌 유리문 앞에서 멍하고 짖는 게 아닌가. 이건 날 위협하는 멍이 아니라 분명 나를 반기는 멍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었더니 본인의 지정석인 코일 매트 위에 올라 뱅그르르 돌며 꼬리를 흔들었다. 요뇨속. 귀여운 뇨속 같으니라고. 뱅그르르 돌다가 얼굴이 아닌 엉덩이를 들이대서 당황했는데 그건 엉덩이를 톡톡 처달라는 신호라고 했다. 플러팅을 아는 마성의 반이. 기쁜 마음으로 엉덩이를 톡톡 해줬고, 다시 뱅그르르 돌더니 또를 외쳤다.


그렇다. 나는 이제 그녀가 허락하는 한 언제라도 그녀의 엉덩이를 톡 해줄 수 있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우린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해 주는 사이, 그러니까 그녀가 기꺼이 엉덩이를 내어주는 사이가 된 것이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반이와 나의 사이를 돌아보며 서점을 찾는 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서로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과정이 이렇게 스무스하다면 어려운 관계가 없을 거란 생각.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남길 바라는 마음. 서점을 찾는 분들이 이런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좋겠는 바람.

조금 어색하게 건네는 반이의 엉덩이처럼 나도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아니, 말을 건네고 있다. 그들이 나의 살랑임에 반응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아줄 것이란 생각으로 계속 시도해 보기로.


앞으로도 반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며.


2025년 5월 3일 반이와 절친 되기 직전의 나

(이 글을 업로드하기 전 6월 5일 현재, 아직도 반이와 절친 되기 직전의 나)




서점원의 문장과 책

: 대놓고 말씀드리죠. 잘 찍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강아지와 사진사 모두에게 고도의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강아지 사진을 찍는 법> 중에서

⟪개를 키웠다 그리고 고양이도⟫,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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