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엔, 마음도 잠시 쉬어간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유난히 꾸물거리며 시작된 하루.
회색빛 구름이 건물 위로 내려앉고
창밖은 물감 번지듯 천천히 젖어들었다.
톡, 톡, 톡…
투명한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텅 빈 집 안을 조용히 채운다.
그 규칙적인 소리들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커피를 내렸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순간,
짙고 부드러운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막 갈아낸 원두의 고소함과
은근하게 퍼지는 쌉싸름한 볶음 향이
천천히 방 안 구석구석 퍼진다.
창가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젖어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색을 잃은 길 위로 우산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물웅덩이엔 동그란 떨림이 겹겹이 번져갔다.
창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엔
젖은 흙과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햇살은 없었지만,
그 흐린 빛마저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평소엔 맑은 날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비가 와줘야
내 마음도 잠시 멈춰 숨을 고를 수 있는 것 같다.
슬픈 일도, 외로운 일도 없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괜히 센치해지는 날.
비 오는 날엔 어떤 영화가 잘 어울릴까.
오늘은 그냥 그 기분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
커피 한 잔을 내려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무심코 TV를 켰다.
‘라라랜드’가 추천 목록에 떠 있었다.
비 오는 낮, 혼자 있는 이 고요한 시간에
딱 어울릴 것 같았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화려한 색감과 음악이 방 안을 채웠다.
익숙한 멜로디, 잔잔한 대사,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한 감정들.
창밖에선 여전히 빗물이 흐르고,
방 안에선 재즈 선율이 가볍게 울려 퍼졌다.
그 조합은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기분 좋게 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낯익은 재즈바.
건반 위로 손이 올려지고,
조용히 흘러나오는 첫 음.
두 사람의 삶이
처음부터 다시,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어쩌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던
어떤 가능성의 시간들.
나는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순간, 아무 말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울면서도 기분은 이상하게 좋았다.
오늘은 그 감정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운 속에서 잠시 더 머물렀다.
오늘 같은 날,
혼자 있음은 외로움이 아니라, 내 마음과의 대화였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이 감정이
오히려 따뜻했다.
그렇게 감정의 물결에 흔들리고 나니
문득 허기가 밀려왔다.
감정도 소모되면 배가 고픈 걸까.
뜨끈한 칼국수를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쫄깃한 면발 사이로 조갯살이 숨어 있었다.
국물 한 숟갈.
입 안을 데우고, 속이 천천히 풀렸다.
매콤한 김치 한 점을 곁들이니
칼국수의 담백함이 더 살아났다.
얼얼했던 감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려버렸다.
평소엔 정신없이 달리기 바쁘지만,
이런 날엔 그냥,
잠깐 멈추고 싶어진다.
오늘은, 혼자였지만
괜찮은 하루였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비 오는 날은,
마음을 조금 더 진하게 느끼게 해주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