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사회에서 살아남는 법

by 정짜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항공사 승무원은 어떤 이미지일까? 오래전 A항공사 광고에서처럼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 혹은 D항공사 광고에서처럼 멋진 유니폼을 입고 따딴 등장하는 모델 같은 여성의 이미지가 아닐까.

실제로 회사에 첫 출근한 날, 나는 '예쁜 사람은 여기 다 모여 있구나' 하며 감탄의 감탄을 했다. 내 또래의 20대 신입 승무원부터 30대, 40대, 50대까지, 그 나이대의 예쁜 여자들은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콧대 높고 기 센 예쁜 여자들이 우글대는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14년 동안 몸으로 부딪쳐 쌓은 여초사회에서 살아남는 나의 노하우, 그중에서도 핵심 포인트 두 가지를 썼다.


chap.1 영리한 곰.

여자는 곰보단 여우가 돼야 한단 말이 있다. 우직한 중전보다 여우 같은 후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왕의 서사는 역사 속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트렌드가 바뀌었다. 누가 봐도 여우인 여우는 환영받지 못한다.


나만 해도 신입 때는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명절이나 가벼운 이벤트가 있을 때 선물을 챙겼다. 그래서 팀장한텐 점수를 땄을지는 몰라도 뒤에선 선배들에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모른다. 그땐 어려서 몰랐다. 센스 있다고 생각한 행동이 제 발로 험담 거리를 그들에게 갖다 바쳤다는 것을.

일단 여자들은 그런 여우짓을 싫어한다. 그래서 영리한 곰이 돼야 한다.

상대방의 어딘가 조금 허술하고 둔한 2% 부족한 포인트를 발견했을 때, 여자들은 호감을 느낀다. 경쟁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어 아니네?' 하는 지점에서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걸 깨달은 순간 난 영리한 곰처럼 굴기 시작했다.


일하다 유니폼에 잘 지워지지 않는 레드와인이나 스테이크 소스가 묻어도 개의치 않는 척했고, (실제론 옷에 뭐가 묻는 걸 극혐 한다) 스타킹에 구멍이 나서 발가락이 삐져나온 걸 동료들에게 보여주며 모자란 애처럼 깔깔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유니폼에 와인을 뒤집어써도 스타킹에 구멍이 날 때까지 열일하는, 수더분하고 성격 좋은 후배가 돼 있었다.


chap.2 밟을 땐 꿈틀 하기.

영리한 곰과는 다른 얘기지만 누군가가 나를 밟을 땐 확실히 꿈틀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같이 싸우라는 것이 아니다. '꿈틀'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같이 싸우자 들면 내 잘못이 아니어도 이미지는 나빠지고 평판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호구되는 세상이다. 그냥 밟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만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하다.


20대 초반, 아무것도 모르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매 비행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게 일상이었다. 언젠가 선배의 실수로 비즈니스 클래스가 만석인 상황에서 치즈가 승객 수의 반만 실린 적이 있었다. 이륙 후 그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으로 영혼이 나간 선배를 위해, 나는 양은 작지만 작아 보이지는 않게끔 최선을 다해 치즈 플레이팅을 하고 있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지나가던 팀장이 내가 세팅한 치즈를 보며 “너 없이 자랐니? 이걸 누구 코에 붙여? 얘 플레이팅 못하게 해.” 하며 면박을 준 적이 있다. 그 순간 얼마나 무안하던지.... 지금이었다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텐데, 그땐 아무 말도 못 하고 빨개진 얼굴로 죄송하다 했었다. 이런 크고 작은 상처들은 내 마음의 굳은살이 되어 점차 나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내가 처음으로 꿈틀 하게 되는 그 일이 있었다.


비행 전 팀원들과 밥을 먹는데 평소에 유달리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선배가 뜬금없이 나에게 대학 어디 나왔냐며 물었다. 별생각 없이 “숙대요” 하니, 그 언니는 “아 어쩐지, 너 숙대생처럼 생겼어” 하며 피식 웃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꿈틀 해야 하는 때가. 그래서 나도 생긋 웃으면서 얘기했다.

언니도 인하공전처럼 생겼어요.


하필 팀에 부팀장부터 인하공전 출신 팀원들이 많아 한동안 눈칫밥을 먹긴 했지만, 그 이후 그 선배는 내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유 없이 시비 거는 사람에게 절대 호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여초사회에서 살아남는 노하우'라는 이 에피소드는 누구보다도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이제 유치원을 간 아이는 벌써부터 같은 반 여자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누구와 친하고 누구와는 다툰 얘기를 매일같이 내게 들려주다 잠이 든다. 벌써부터 여자들의 '니편 내편' 무리를 짓는 어려움을 나에게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냥 아기 같던 딸이 여자들의 그룹문화에 나름 애를 쓰며 적응해 나가는 게 귀엽기도, 짠하기도 하다. 피할 수 없는 여자들의 그룹문화에서 우리 아이는 나보다 덜 상처받고 나보다 더 단단한 사람으로 크길 바라며, 훗날 그녀의 여초사회에서 살아남는 노하우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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