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한국문학 – 하늘과 먹이의 교차
시스템이 통째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 있나요? 회사가 인수합병되면서 모든 규칙이 바뀌거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책이 180도 달라지는 순간 말입니다. 어제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오늘부터 금지되고, 어제까지 금지였던 것들이 오늘부터 권장됩니다.
혼란스럽죠. 하지만 더 혼란스러운 것은 사람입니다. 어제까지 순응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저항하고, 어제까지 저항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순응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두 시스템 모두 거부하고 제3의 길을 찾다가 소멸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 개의 하늘을 지나왔습니다. 봉건의 하늘, 식민의 하늘, 분단의 하늘. 각각의 하늘 아래에서 물고기들은 어떻게 펄떡였고, 그 펄떡임이 어떻게 강물을 바꾸고 하늘을 바꿨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봉건의 하늘 - 신분제라는 질서
1800년대 조선. 하늘이 던진 것은 명확했습니다. "네 신분을 알고, 네 자리를 지켜라." 양반은 양반답게, 기생의 딸은 기생의 딸답게. 이것이 하늘의 법이었습니다.
춘향은 변학도 앞에 끌려갔습니다. "수청을 들어라." 하늘이 던진 먹이였습니다. 기생의 딸에게 주어진 법(신분 질서)과 촉(권력자의 수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춘향의 의(意)는 달랐습니다. 춘향이 인식한 법은 의리와 절개였습니다. "일개 수청이 무삼 영광이리오? 천하 백성이 다 수청을 든다 할지라도 첩은 아니하리이다." 하늘이 던진 법(신분 순응)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가 추구하는 법(의리와 절개)을 선택한 것입니다.
홍길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서의 차별이 어찌 천리에 합당하리오?" 하늘이 던진 법(적서 차별)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가 추구하는 법(평등)을 쫓았습니다.
반면 봉건 질서에 순응한 물고기들도 있었습니다. 신분에 맞게 과거를 보고, 양반은 양반답게, 상민은 상민답게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의 의는 하늘이 던진 법과 일치했습니다. 순응했고, 평화로웠고, 생존했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쓰지 않았습니다.
식민의 하늘 - 민족 말살이라는 질서
1920년대 조선. 하늘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신분제는 무너졌지만 더 강력한 질서가 들어섰습니다. "황국신민이 되어라. 일본에 순응하면 살 수 있다." 하늘이 던진 법(친일, 신교육)과 색성향미촉(일본식 생활)이었습니다.
염상섭의 이인화는 도쿄 유학생이었습니다. 일본 교육을 받고, 일본어를 쓰고, 일본 땅에서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늘이 던진 먹이를 먹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하나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이인화의 의(意)가 인식한 법은 민족의식이었습니다. 하늘이 던진 법(친일)과 충돌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습니다. 아내는 조선의 색성향미촉 전부였습니다. 아내의 모습(색), 아내의 목소리(성), 아내의 정취(향), 아내의 음식(미), 아내의 손길(촉).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일본식 생활)과 이인화가 추구한 것(조선의 감각) 사이의 불일치가 아내의 죽음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심훈의 채영신은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흙에 묻힌 나는 상록수가 되리라." 하늘이 던진 법(친일)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가 추구하는 법(농촌 계몽)을 실천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심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죽었습니다. 병들어 쓰러졌습니다.
반면 이광수의 이형식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신교육과 계몽이라는 법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제가 허용한 범위 내의 법이었습니다. 결국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로 전향했습니다. 하늘이 던진 법과 자신의 의가 일치하도록 자신을 바꾼 것입니다. 순응했고, 생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지금 읽히지 않습니다.
분단의 하늘 - 체제 선택이라는 질서
1950년대 한반도. 하늘이 또 바뀌었습니다. 일제는 물러갔지만 민족은 쪼개졌습니다. 두 개의 하늘이 들어섰습니다. 남한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법을 던졌고, 북한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법을 던졌습니다.
최인훈의 이명준은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남한의 밀실에서는 "개인적인 것, 사적인 것만 있고, 공적인 것은 없다"라고 느꼈습니다. 북한의 광장으로 갔지만 그곳도 "집단을 강요하고, 획일화를 요구하고, 개인의 사유를 억압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명준의 의(意)가 추구한 법은 완벽한 이념적 완결성이었습니다. 진정한 공적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의 밀실도, 북한의 광장도, 그것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던진 법(남한 체제 or 북한 체제)과 명준의 의가 추구한 법(완벽한 이념) 사이의 불일치. 명준은 중립국행 배에서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범선의 송철호는 이념조차 사치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도 다 같이 미쳐보자구."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오직 생존만이 절박했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이념 선택)과 철호가 필요한 것(먹을 것) 사이의 불일치. 오발탄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 속에서 철호는 정신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어떻게 바뀐 것일까요? 스스로 변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고기들이 바꾼 것입니다.
1단계: 개인 차원의 충돌
각각의 물고기는 6개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으로 하늘이 던진 먹이(색성향미촉법)를 인식합니다. 특히 의(意)가 핵심입니다. 의는 뜻이고, 신념이고, 의지입니다. 의가 법을 인식하고 판단합니다.
하늘이 던진 법과 의가 추구하는 법이 일치하면 순응입니다. 불일치하면 거역입니다. 춘향의 의는 신분제를 거부했고, 이인화의 의는 친일을 거부했고, 명준의 의는 불완전한 체제를 거부했습니다.
2단계: 사회 차원의 연대와 충돌
비슷한 의를 가진 물고기들끼리 모입니다. 조선 말기, 신분제에 불만을 가진 물고기들이 동학농민운동으로 뭉쳤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가진 물고기들이 독립운동으로 모였습니다. 해방 후, 남한 체제를 지지하는 물고기들과 북한 체제를 지지하는 물고기들이 각각 무리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순응하는 물고기들도 있었습니다. 신분제를 받아들인 양반들, 친일을 선택한 지식인들, 남한이나 북한 체제를 받아들인 사람들. 그들의 의도 하늘이 던진 법과 일치했습니다.
물고기 무리들 사이의 충돌이 강물을 바꿉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지만, 강물에 균열을 냈습니다. 독립운동과 친일 세력 사이의 강물 싸움에서 친일파가 이겼고, 그래서 식민의 하늘이 더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의 강물 싸움은 분단이라는 하늘을 만들었습니다.
3단계: 시스템 차원의 변혁
강물의 변화가 충분히 크고 지속적이면, 운동이나 혁명의 형태로 발전해서 하늘 자체를 바꿉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의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다음에 볼 4.19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고, 6월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가 무너집니다.)
하지만 하늘이 바뀐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하늘은 새로운 법을 던지고, 물고기들은 또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순응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
500년을 돌아보니 명확합니다.
변한 것:
하늘의 질서 (봉건 → 식민 → 분단)
하늘을 떠받치는 먹이(색성향미촉법의 구체적 내용) : 봉건- 과거급제, 신분에 맞는 음식과 의복, 유교 질서. 식민-신교육, 일본어, 일본식 생활, 친일 이념. 분단- 남한 체제의 것들, 북한 체제의 것들
물고기들의 운명
변하지 않은 것:
물고기의 욕망 구조(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지각한다는 것 자체)
하지만 그 욕망의 구체적 모습은 알 수 없고, 그 끝도 알 수 없음
그래서 물고기는 끝없이 펄떡임
충돌의 구조(의가 인식한 먹이 ≠ 하늘이 던진 먹이 → 괴로움)
춘향도, 이인화도, 명준도 모두 같은 구조 안에 있었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과 자신의 의가 추구한 것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거역했고, 괴로워했고, 펄떡였습니다. 그 펄떡임이 문학이 되었습니다.
반면 순응한 물고기들은 편안했지만 문학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친일 문학은 지금 읽히지 않습니다. 배부른 자는 펜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이 충족되면 굳이 괴로움을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학은 거역한 물고기들의 것입니다. 배고픈 물고기들의 펄떡임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영원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거역하는 물고기는 계속 나타나고, 그들의 괴로움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봉건의 하늘, 식민의 하늘, 분단의 하늘을 지나왔습니다.
이제 또 다른 하늘들이 기다립니다. 독재의 하늘, 자본의 하늘, 신자유의 하늘. 하늘이 바뀌니 던지는 법도 바뀝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던졌고, 전두환은 3S정책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효율을 던집니다.
하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과 물고기의 의가 추구하는 것이 일치하면 순응이고, 불일치하면 거역입니다. 순응한 물고기는 살아남지만 문학을 쓰지 않고, 거역한 물고기는 괴로워하지만 문학을 남깁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한강의 《소년이 온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 작품들도 같은 구조입니다. 하늘이 바뀌었지만, 물고기는 여전히 펄떡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2부 9회: "독재의 하늘 –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소년이 온다》" . 박정희는 경제성장이라는 먹이를 던졌고, 전두환은 3S정책이라는 먹이를 던졌습니다. 독재가 던진 법과 민중들이 추구한 의는 어떻게 충돌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