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 일하는 나 : 다른 회사를 선택했지만, 왜 나는 같았을까?
2004년 구직 중이던 나는 처음부터 회계 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장기화된 경기 침체로 인해 청년 실업자가 50만 명을 육박하는 이때에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시트콤 ‘논스톱 4’에 나오던 이 농담 같은 대사는 내게 현실이었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계속 구직에 실패했고, 나는 초조해졌다.
구직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던 ‘경리’라도 해볼까 하는
조급한 마음으로 회계 자격증 공부를 선택했고,
그렇게 나는 전공과는 전혀 다른 회계 일을 시작하게 됐다.
스무살 무렵, 사무보조로 잠깐 일했던 첫 직장 이후
약 4년 만에 다시 사회에 발을 디딘 회사는 가족회사였다.
출퇴근 시간이 왕복 4시간에 달했지만,
나를 받아준 회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시작이 꽤나 조급했고, 불안했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놓쳤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회사는 가족 간 재산 분쟁으로 매일 갈등이 심했고,
나는 회계업무와 상관없는 일만 반복했다.
그렇게 지쳐가던 나는, 딱 1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기간만 채우고 짐을 쌌다.
그 후로 반복되는 이직,
끝없는 취업준비.
회사를 떠날 때마다 나는 다짐했다.
'다음 회사는 반드시 더 나은 곳으로 가자. 제발 안정적인 곳으로...'
다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나는 이직할 때마다 자격증을 하나씩 더했고,
회사에 다니며 방통대를 병행해 결국 경영학과 졸업장까지 손에 넣었다.
구직사이트에서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들의 지원조건인
경영학과 우대, 4년제 졸 이상이라는 단 한 줄의 자격을 얻기 위한 나의 절실함이었다.
이직 후 새로운 회사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분위기,
중소기업의 불안정한 시스템,
그리고 보수적인 직장문화는 이전 회사들과 놀랄 만큼 서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이직을 반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새로운 업무가 아니었다.
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다.
경력직으로 입사하면 항상 전임자와의 비교가 따랐고,
이전 방식과의 충돌, 새로운 제안에 대한 거부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돌아오는 수많은 거절들에 부딪혔다.
“전임자는 그냥 해줬는데요.”
이 말은, 내가 바꾸고 싶었던 구조 앞에서 가장 자주 마주한 벽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름의 ‘적응법’을 만들어갔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개인주의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되,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
예를 들면, 식사나 티타임, 회식 같은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지만,
그 안에서 내 감정이나 의견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사적인 친분도 경계했다.
가깝다는 이유로 기대하거나 오해하는 관계는
내게는 더 큰 소모였고,
차라리 차갑게 보이더라도
업무로만 나를 평가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크게 무리가 없다면 의견을 받아들이되,
업무적으로 반드시 바꿔야 한다고 판단한 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사람들은 어느새 나를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17년 동안 7군데의 회사를 거쳤다.
어느 곳에서도 대단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결국 나는 또다시 울타리 밖에 서 있다.
'왜 나는 계속 이 자리에 있는 걸까?'
회사를 떠난 이유는 대부분 내게 있지 않았는데,
결국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책임지는 건, 늘 나였다.
'나는 회사를 잘 고르지 못하는 사람일까.'
'선택의 순간마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는데, 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스친다.
'이 일이 정말 나에게 맞는 일이기는 한 걸까.'
회계 일을 하며 정말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이 일이 정말 내가 바라던 삶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다.
회사를 나올 때마다,
나는 다시 ‘혼자’라는 상태로 돌아갔다.
이젠 그 고요한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누군가는 한 회사에서 10년, 20년을 보내며 자리를 만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출입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 물음에만 매달리지 않으려는 지금의 나를.
그리고 어쩌면,
'계속 다른 회사를 선택했지만 왜 나는 같았을까?'라는
이 오래된 질문 자체가,
내가 더 나은 삶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