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남겨준 것

함께 할 수 없어도 슬프지 않은 이유

by 에스더

난 비혼주의주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결혼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어린 시절, 그리고 엄마가 살아 계실 때까지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하시는

엄마아빠를 보고 자라면서

정말이지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하고 생각했다.


새벽 장사를 하셨던 엄마는

낮에는 늘 잠들어 있었고,

밤에는 출근을 하시느라

늘 엄마 없는 밤을 무섭게 보내야 했다.

엄마가 있어도,

엄마의 부재를 느끼며 자랐다.


어른이 된 내가 자식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보니

낮밤이 바뀐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싶다.


딸린 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일념하나로

그 고된 새벽 장사를 10년을 넘게 하시면서

단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는

지독스럽게 성실한 엄마였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버티고 견딜 수 있었을까.



이렇게 강인한 엄마였지만,

나에게는 늘 다정했고, 따뜻하고,

짬을 내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편지나 전화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우울한 나를 웃겨주는 푼수 같은 엄마였다.


난 이런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낮에 잠만 자야 했던 엄마를

깨우지도 못하고

침대옆에 앉아

소리 없이 훌쩍거릴 때가 많았다.


늘 깨어 있는 엄마를 그리며

엄마의 숨소리만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 1997년

IMF경제 위기 때

부모님의 사업체는 부도를 맞아

큰 빚을 안고 문을 닫아야 했다.


아빠는 채권자들을 피해

숙식을 제공하는 택시회사에 들어갔고

엄마는 시댁 동네로 이사와

지하 단칸방을 얻어

시댁 식구들과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로 생계비를 벌어 우리를 키우셨다.


하루아침에

아빠 없는 세 식구가

길가에 있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게 되었지만

불평불만은 1도 없었다.


오히려

이때부터가

나의 가정사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엄마와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에 엄마와 하는 밤 산책은

그저 꿈만 같았다.


학교가 끝나면

늘 엄마가 있는 공장으로 달려가

미싱소리가 들리는 공장 귀퉁이에서

학교 숙제를 했다.

가방 놓고 학원을 갔다가도

엄마 퇴근시간에 맞추어 돌아와

엄마와 손잡고 집까지 걸어서

함께 퇴근을 하였다.


친가 식구들은

사업이 망해 아빠도 없이

그 좁은 집에서 산다고

용돈도 쥐어 주시고

나를 애처롭게 보셨지만

매일 엄마에게로 달려가

깨어있는 엄마를 볼 수 있음에

더 없이 행복하고 신나는 하루하루였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는게 무색하게

난 유아기의 아이처럼 늘 밝았다.

엄마만 따라다며

엄마를 온몸으로 느끼고 만끽하였다.

초가삼간이라도

엄마만 있으면 살 것 같이

엄마가 참 좋았다.


이렇게 소중한 엄마를

도와 줄일이 없을까,

기쁘게 할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에

새벽시간마다 일어나

책상 스탠드에 얇은 수건 걸쳐놓고

흐릿한 빛으로 학교 공부를 하였다.


좋은 성적을 보여주면

얼마나 힘이 나실까 하는 마음에

목표도 없이

매일을 일어나 예습복습을 하였다.

내옆에 잠자고 있는 엄마가 사랑스러웠다.

낯설고 귀찮은 새벽 일상이었지만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결과는

중위권이었던 석차가 전교 7등까지 올랐고,

반석차는 1등을 찍었다.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1등에

친구들의 몰려들었지만

친구들을 뒤로하고

성적표를 강아지처럼 휘날리며

엄마가 있는 공장으로 달려갔다.


과목마다 1자리 숫자의 석차를 보시며

‘역시 우리 딸’ 한마디 하시고는

찔찔 흘리고 있던 내 콧물을

맨손으로 닦아 주셨다.


애미눈에는 화려한 성적표보다
콧물로 얼룩진 딸래미 얼굴이
더 아까웠나보다.


이토록

엄마의 손길과 마음은

늘 따뜻했고 다정했다.




그런 엄마와의 시간이

내가 30살을 1년 앞둔 어느 날 끝났다.


지독스럽게 살아온 30년이란 세월 동안

감기 한번 앓지 않았던 엄마에게

침묵의 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간암 말기.


여기저기 쑤시고 늘 속이 아프다고 했지만,

낮이면 다시 기계처럼 살아나

하루를 거뜬히 살아 내셨던 엄마였다.


그러다

너무 비대해진 간암 덩어리가

갈비뼈를 눌러 그 통증에

병원에 가봤던 것이고,

손 써볼 수도 없는 상태로

간암 진단을 받은 지

6개월 만에 내 곁을 떠나셨다.




엄마가 전부였던 나.

엄마 밖에 몰랐던 나.

난 어떻게 되었을까?


장례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지만

처리할 일들과

엉망이 된 집안 청소부터 해야 했다.

3일 뒤에 회사에 복귀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고 메일을 체크해야 했다.


내 전부였던 엄마라는 존재를 잃은

딸의 일상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게 않게 흘러갔다.


애써 슬픔을 곱씹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눈물이 나거나

슬픈 감정이 일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를 슬픔으로 가져간다면

과연 내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의 우주였던 엄마인데 어떻게..


그래서

엄마를 영원히 갖기로 했다.

내 마음 한곳에 엄마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참 행복했다.

너무 행복했다.

넘치도록 엄마를 갖었었다. 라고.


무엇보다

한평생 고단한 삶을 살았던 엄마가

이제는 더이상 새벽에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않고

깊이 편안히 잠들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한달 뒤,

회사 아래 있는 가연(결혼정보회사)본사에 등록을 하고 30대 시작은 가정을 꾸리기로 다짐했다.


6개월동안 최소 주3회 이상 소개팅을 나갔고,

통성명만 거치면

“저 소개 시켜줄 사람 없어요?“ 하며 대놓고

소개를 부탁하였다.


그렇게 6개월동안 60번이 넘는 소개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과

지금 살고 있다. 아들딸 낳고.




성실했던 엄마

사랑이 가득했던 엄마

가난했어도 씩씩했던 엄마를 기억한다.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것의 형체는 없어진다.


하지만,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던

20대 끝자락까지의 엄마와의 시간은

참으로 차고 넘치도록 충분했다.


엄마는

나에게 다 주고 가셨다.


내가 얼마나 귀한지.

내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지.

매순간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컸다.

온 힘을 다해 낳고 길러 주셨다.


나는 다 받았다.

엄마는 나의 자부심이자 자존감의 근간이다.


그래서 그렇게 떠나는 엄마를 편안히

보낼 수 있었다.



<1988 응답하라>

노모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동일은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최택에게

"택이는 엄마가 언제 제일 보고 싶으냐?"라고 말을 건넨다.


최택은 대답한다.

"매일이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천재 바둑 기사 최택에게도


엄마는

매일 보고 싶은거다.




이 세상에

엄마만큼 좋은 게 있을까.


내 아이가 태어난 날

내 아이가 걸어다는 순간

내 아이가 처음 말하는 순간

내 아이가 피아노를 처음 친 날

.

.

.

이 모든 순간

엄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상상한다.

엄마가 이걸 봤다면

얼마나 날 장하다고 여길까.

또 얼마나 다정한 말들을 나누며 우린 행복했을까.


그저 그뿐이다. 슬픔은 없다.

떠올릴 수 있는 엄마의 존재에 감사한다.


엄마가 내게 해줬던 것을 기억하며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을 건낸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나중에

엄마라는 나의 형체가 없는 날이 올때


"네가 나에게 얼마나

귀하디 귀한 존재였는지."를

느낄 수만 있다면 된다.


내가 그런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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