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자리에서 마주한 또 다른 초입
짧은 여정이 끝났다.
익숙한 향기, 오래된 시선이 머무는 곳.
기억의 안쪽에서 걸어 나온 풍경이
조심스럽게 발끝에 감긴다.
천천히 딛는 걸음.
태초에 숨을 틔웠던 자리로.
하지만 도달한 곳은
기억 속 색과는 조금 다른 장면.
사진 속에서 퇴색된 시간처럼,
그리움의 프레임과는 어긋나 있다.
계절은 나뭇잎의 색을 바꾸고,
바람은 오래된 가지를 떨어뜨린다.
앙상한 잔가지만이 남아도
그 나무가 여전히 나무인 것처럼
낯설지만 어디선가 익숙한 이곳,
다시 살아내야 할 공간.
아니, 살아보려는 마음이 움튼다.
눈앞에 놓인 길은
많은 이들이 지나간 흔적 위에 놓여 있다.
그만큼 다양한 방향,
그만큼 무거운 발자국들.
이미 한 번 떠났던 존재이기에
이번에도 걷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불완전한 마음은
선명한 그림자보다 그 뒤의 잔상에 머문다.
걸어야 할 이유보다
머물러야 할 변명을
먼저 찾아내는 어린 자아.
그렇게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며
무의미한 회전만을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멈춤이 찾아왔다.
그리고 보였다.
다른 이들이 지나온 그 길,
평범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갈래.
다시, 길 위에 선다.
익숙함 속에 감춰졌던 낯섦을 품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다.
하나씩 지워지는 목록들,
그만큼 다가오는 새로운 궤도.
거울 앞에 선 듯,
이동의 실체가 비로소 또렷해진다.
항상 이유를 뒤로 미뤘지만,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제는 머뭇거릴 수 없다.
언젠가의 먼 미래가 아닌,
현실의 내일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