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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P들의 무계획 여행 1탄

밤 9시, 순천에 도착하다

by 소소한 여행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계획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시험공부도, 소풍 준비도, 심지어 대학 입시조차

‘일단 해보자’로 버텼다.


이번 순천·여수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정해둔 건 지역과 날짜, 숙소 예약, 그리고 기차 예매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여행이 알아서 채워줄 거라 믿었다.


서울역 플랫폼에서 우리는 수학여행 전날의 열여덟처럼 들떠 있었다. “재밌겠다.” “뭐 할까?”서로 묻고 웃었지만, 대답은 정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무계획인 채로 출발하는 게 더 설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출발 안내 방송 대신 ‘운행 지연’이라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0분, 30분, 1시간… 처음엔 웃음이 나왔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무계획이 무한 대기 시간으로 변했다. 결국 순천이 아닌 서울역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부대찌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보며 “여행 첫 끼가 부대찌개라니” 하고 웃었다.


밤 9시가 되어서야 기차는 순천역에 도착했다. 늦은 밤 마트에 들러 간단한 야식을 사고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택시 기사님이 “안쪽이라서 혼자 돌아가기 무섭다”라고 하셨다.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길 양옆으로 가로등 하나 없는 숲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스산했다.


구불구불한 길 끝에,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인 한 채의 한옥이 나타났다. 사장님이 마중을 나와 웃으며 맞아주셨다. 짐을 풀고 막걸리를 잔에 따랐다. 전자레인지에서 데운 피자를 꺼냈는데, 접시가 너무 작아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둘 다 한참을 웃었다.

늦게 도착한 게 아쉽긴 했지만,

웃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게 더 좋았다.


순천의 아침은,

전날 밤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갈대밭, 햇살, 그리고 다시 시작된 우리의 무계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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