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무너졌던 나를 데리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어떤 결정도 낼 수 없을 만큼 피로했고,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에 가고 싶었다.
내가 발리를 떠올린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곳을 생각하면,
숨 쉴 틈이 날 것 같아서였다.
나를 알아볼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고,
누구 하고도 말하지 않아도 되며,
하루의 리듬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때에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은 곳.
미지의 세계, 그곳이 나에겐 발리였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된 프리랜서 삶의 종지부를 찍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소위 말하는 대기업.
부모님은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하셨고,
나는 이제 탄탄대로의 삶을 살게 되리라 믿었다.
입사 초기,
‘동경하던 직업인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자부심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채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현실은 달콤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치열한 경쟁,
하루하루 ‘채워가는 삶’이 아니라,
버티는 삶이었다.
스물아홉.
그때의 나는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지는 전화를 받아내고
업무를 소진하듯 쳐내는 날들.
퇴근 후 그 누구의 전화도 반갑지 않았다.
아니, 받아줄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랑하던 연인과도 멀어졌고,
나의 힘듦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모님과도
처음으로 대립의 각을 세웠다.
내가 마음 기댈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발리와의 첫 만남은, 나의 벼랑 끝에서 시작됐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짐을 꾸리는 내내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뒤로하고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을까.
부모님은 실망하지 않으실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용히, 무너졌던 나를 데리고 발리와 마주했다.
그날의 하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도 맑았다.
조용히. 무너졌던 나를 데리고.
사람들은 여행이 새로운 걸 보여준다고 말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가장 먼저 바뀌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걸.
그때의 발리가 내게 알려줬다.
시선의 방향키는 나에게 있고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 여정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퇴사'를 결심하는 일이었다.
막상 결정을 내리고 보니, 별일은 없었다.
세상은 그대로였고, 나는 한결 가벼워졌다.
무너질 듯한 마음이 먼저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조용히 내 삶의 방향을 바꿨다.
놀랍게도 다음 문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