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읽고 있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수학이라는 언어로 해석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뉴턴의 역학은 느린 속도의 세계를 탁월하게 설명했지만,
빛과 전자의 세계, 즉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자 기존의 법칙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았다.
과학의 발전은 언제나 ‘설명되지 않던 현상’을 다시 설명하려는 인간의 집념에서 시작된다.
뉴턴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
전자기학의 발달과 함께 빛의 성질을 다루는 실험들이 등장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두 가지 단순하지만 혁명적인 가정을 세웠다.
첫째, 물리 법칙의 형태는 모든 관성계에서 동일하다.
둘째,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는 관찰자나 광원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항상 일정하다.
이 두 가지 공리로부터 놀라운 결론이 도출되었다.
빛의 속도는 초속 약 30만 킬로미터로,
누가 어디에서 보든 변하지 않는다.
즉, 우주에서 빛의 속도는 절대적 기준이며,
시간과 공간은 그 기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한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하는 방향의 길이는 짧아진다.
그 결과,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은 사라지고,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물리학의 원리는 나에게 철학적 통찰을 준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생각과 가치,
그리고 각자의 신념 또한 관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성별, 기질, 지능, 문화, 신앙, 언어, 환경, 교육, 사회적 지위 등
이 변수들이 다르기에,
각자가 옳다고 믿는 윤리와 진리는 결국 상대적 맥락 속의 단면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어떤 사람은 정의를, 또 어떤 사람은 평화를 더 중시한다.
그 차이는 틀림이 아니라 다양성의 표현이다.
그러나 상대성은 곧 도덕적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에도 변하지 않는 절대값, 빛의 속도가 존재하듯,
인간 세계에도 변하지 않는 윤리의 중심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며,
인간 존엄과 자유의 근원이자 모든 도덕의 출발점이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 관찰자의 시점이 달라져도
그 가치가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의 상수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내면에 파괴적 본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으면, 인류는 스스로 만든 기술로 멸망에 이를 것이라 경고했다.
핵무기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말은 단순한 과학자의 우려가 아니라 윤리적 예언처럼 들린다.
지식은 점점 커졌지만,
우리의 내면은 그만큼 성숙해졌는가를 묻게 된다.
결국 상대성이론은 이렇게 속삭인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
상황과 관점이 달라도 사랑과 존엄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 불변의 기준이 있을 때,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빛의 속도가 우주의 질서를 세웠듯,
사랑은 인간 세계의 질서를 세운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은 단지 물리학의 법칙이 아니라,
삶의 진리를 비추는 철학의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