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노쇼

따뜻한 햇살로 남겨진 시간

by 이현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잔인한 벌은, 이미 가진 것에는 눈멀게 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과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게 된 자들의 고통을 관례처럼 묵묵히 지켜보는 것, 어항 속 예견된 죽음을 앞둔 생명체들을 표정 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은 것일까.


잉태되고 세상을 마주하기 전 10개월의 준비기간을 내어주는 것에 비해, 죽음이라는 녀석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예측하지 못했던 이별 앞에서 불화살로 심장을 후벼 파는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영원히 그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내가 오늘 만났던 모든 이들, 내일 또다시 마주할 인연들과의 이별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함께했던 지난 10년 동안 단 1분 1초의 지각 한번 한 적 없었던 오래된 고객님의 예약 노쇼에 이참에 미루었던 책이나 읽자 하여 평온의 시간을 누렸던 그날은 창문으로 여과된 햇살이 유난히 투명했던 날이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나를 좋아한다고 자주 말해주었다. 어디 가지 마세요 미용실 꼭 오래 해주세요. 돌이켜보니 그날 나를 온몸으로 감싸주었던 따뜻한 햇살은,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고결한 영혼의 아쉬운 작별 인사였나 보다. 사려 깊은 당신은 마지막까지도 내게 위로와 평온의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난달 염색을 빌미로 마주했던 시간이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미친척하고 손 한번 꼭 잡아볼 걸 그랬다. 들어본 적도 없는 당진이라는 곳에서 그대같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제 등치보다 더 큰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있던 아이들의 입학식과 졸업식까지, 감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가 함께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어 감사했다고, 미처 보답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꼭 기억하겠노라 아무리 외쳐도 더 이상 닿을 곳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온다.




고인의 고향이었던 춘천에서,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머리를 정리하러 온 아이들과 남편분의 얼굴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아니, 본인들로 인해 이 공간의 분위기가 침체되지 않기를 작정이라도 한 모습으로 무장되어 있는 ‘긴장감’이라 해야 정확하겠다. 고인은 늘 타인에게 피해가 갈까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 배려 깊은 면모가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묻어나 있기에, 미용사와 고객으로 만난 우리의 10년은 서로에게 단 한 치의 실수도 범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해 왔던 시간들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한 집 건너 미용실이라 흔한 직업군이라는 세간의 믿음 탓일까. 미용사의 시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들어줄 자도 없거니와 말하고자 하는 여유도 딱히 없었던 이유는, 이 직업의 종사자들이 늘 '바쁨'이라는 책임감에 옥죄여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이별을 경험하며, 사람마다의 고유한 깊이를 알게 될수록 나는 되려 속도를 늦추게 되었다. 미용경력이 쌓일수록 기술력의 스피드가 아닌, 느림의 미학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 꽤나 근사한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조금은 느린 호흡으로 지내며 내 앞에 마주한 타인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로 했다. 그 좋아하던 격식이라는 것을 집어내 던져버리고 유한 자태를 가져보게 되었다. 그것이 고객님이던 함께 일하는 직원이던 가족이던 상관없다. 원래도 물 같은 사람이, 더욱더 본격적으로 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삶을 살기를 선택했다. 혹여나 나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지독한 악연일지언정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안타까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겹겹이 복잡하게도 쌓여있는 모든 상황을 덜어내고 나면 드러나는 날 것의 이름 석자. 그것만이 내 남은 여생을 자유롭게 만들어줄 고인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슈 하나 없이 잔잔했던 우리 관계의 종지부를 찍는다. 당신의 어린아이들은 건장한 청년과 예쁜 여인이 되어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나갈 것이다. 내 삶이 허락하는 한, 그 청년과 예쁜 여인의 먼발치에서 묵묵히 관여하기를 다짐한다. 인연은 투명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기에 나 또한 선하게 잘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게 된다. 당신이 여백에 남기고 간 발자국은 영원히 굳지 않을 만큼 따뜻한 세상이었다.




오늘은 그날처럼 유난히 하늘이 맑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특혜를 가지고서도 무엇을 더 바라며 살아가겠는가. 새 한 마리만 그려놓으면 여백 모두가 하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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