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자친구 결혼식

"이번 주 토요일에 머리 할 수 있나요?"

by 이현지




이번 주 토요일에 머리 할 수 있나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객님의 음성은 적잖이 다급했다. 보통 이 업계의 토요일은 전쟁통처럼 바쁜 날이기에 헤어디자이너에게도 일주일 중 가장 긴장되는 요일이기도 하다. 토요일예약은 늘상 한참 전에 예약이 마감되기 마련이거늘 당장 내일 예약을 잡아달라니, 아무리 신규고객님이지만 이 사람 미용실 룰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싶었다.


예약마감으로 인한 매장 상황을 전해드리며,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으로는 혹시 모를 취소자리가 났는지 예약창을 분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이내 말을 이어갔다.


"저.. 내일이 전남자친구 결혼식이라 망하면 안 되거든요. 꼭 여기서 머리를 하고 싶었는데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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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아침, 나른한 오후, 고요한 밤. 하루의 시작과 끝에도 자연의 순리가 있듯, 개인의 일상에도 조용히 반복되는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자연에 비할 수 없는 한낱 인간일 뿐이기에, 정해진대로만 흘러갈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살다 보면 장황하게 세워놓은 계획이 무색해질 만큼, 열일 제쳐두고 우선순위로 끌어당겨야 할 초 긴급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라니...' 고객의 용모를 아름답게 꾸며준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미용사에게는, 당신이 가장 빛났으면 하는 날에 기여되고 싶은 발작버튼이 작동되는 순간이다.



"고객님 잠시만요! 원래 영업시간은 10시부터이지만 몇 시간 일찍 방문해 주실 수 있나요?"



안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상황.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혹여나 정말 머리를 망쳐서 최악의 날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덜컥 예약을 잡아버렸다. 생각해 보면 난 가끔 나답지 않게 용감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지하철을 헤매던 외국인에게 말을 걸어본 일, 서먹한 회식자리에서 뛰쳐나가 사장님 대신 마이크를 잡는 일,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둡고 외진 길을 걸어가는 여학생 뒤에서 꺼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엄마 나야, 지금 가고 있어' 하며 뒤 따라가는 내가 여자임을 알려주는 일,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이론적인 변론은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을 때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졌던 것 같다.












<am06:00>


애석하게도 제시했던 몇 시간 일찍은, 오전 6시로 예약이 되어버렸다. 급한 대로 매직과 뿌리염색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울 만큼 애교가 많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정신없이 바빠서 머리 할 생각도 못하다가, 어제 퇴근길에 아차 싶어서 부랴부랴 연락했다며 연신 고마워하는 고객님.



간단한 인사와 스타일에 대한 상담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시술에 들어가게 된다. 시술하는 내내 꼭 필요한 질의응답 외에는 서로 말이 없었던 우리 두 사람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시간 맞춰 끝내야 한다는 업무적인 생각이 가장 컸던 것 같고, 고객님은 글쎄 잘 모르겠다.



대개 엄청난 축하를 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미리 나서서 잘 묻지 않는 편이다. 시간 내 끝날 수 있도록 머리를 예쁘게 하는 것에만 집중하며, 매장의 BGM을 차분한 음악으로 재생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려니 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처음 만난 날, 창문 밖의 어둠이 정화되며 해가 뜨는 일출을 같이 본 사이가 되었다. 그것도 머리를 하면서 말이다. 어둠이 걷히는 하늘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내 평생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난 우리 사이의 황당한 상황이 기가 찰 노릇이다.



일을 하다 보면, 간혹 그때처럼 '상황'이 앞서게 된 만남이 찾아오기도 한다. 경험상 이런 특별한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고객들과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는 내적친밀감이 생겨 훨씬 더 장기적인 인연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미용과 삶이 닮은 점이 있다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용실의 경우, 헤어디자인이나 결과물에만 시선이 국한되어 운영된다면 잦은 슬럼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는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보니 '기술'에 대한 노력을 끊임없이 갈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미용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어느 미용실에서나 다 할 수 있는 애쉬브라운에 대한 테크닉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고객이 염색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들어가는 정도의 '관심'을 부재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뜻한 관심이 앞선 기술은, 날개를 달고 상대방의 내면까지 날아오르게 한다. 한 사람의 온전한 위로가 되기 위해 나의 기술이 쓰임을 이해하는 삶은, 번아웃이 새어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단단한 고요함을 가져다주며,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많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



전 남자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했던 고객님은 그날 이후 7년째 우리 미용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좋은 남자를 만나 예쁜 새 신부가 되었고, 지금은 소중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혼자였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지내는 워킹맘이지만, 가족들과의 알콩달콩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더욱더 여유롭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문득 탁상달력의 올해 남은 뒷장들을 들여다본다. 몇 월의 어느 날, 어느 빈칸에 어떤 인연이 내게 올지 모른다. 또 언제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여 몇 월 며칠이 기념일로 결정지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예쁘게 꾸며진 다이어리처럼 하루하루를 채워가기 위해 오늘을 더 의미 있게 살아내려 한다. 설렘 가득한 얼굴로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예쁜 선물을 전해주고 싶어지는 어른의 마음처럼, 세상 또한 그런 이치로 흘러가고 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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