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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1. "중국" 지리가 만든 전쟁의 역사

by 김장렬
중국지리.png 중국의 지리

중국은 너무 크다. 지도를 펼쳐도 한눈에 담기지 않는다. 서쪽 끝의 히말라야에서 동쪽 바다까지, 북쪽 초원에서 남쪽 정글까지, 이 대지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 위에 14개 나라와 접한 국경이 있고, 황하와 장강이 흐르며, 눈 덮인 산맥과 모래바람 부는 사막이 있다. 중국은 이 모든 지리를 끌어안고 살아왔다. 산과 강은 보호막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침략과 전쟁을 불러오는 통로였다. 제국은 그 위에서 세워지고 무너졌으며,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었다.


중국의 해안선은 약 18,000㎞에 이른다. 그러나 이 긴 해안은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황하와 장강이 문명의 중심을 이루었고, 바다는 그저 외적이 들어오는 길처럼 보였다. 명나라가 *정화의 원정을 통해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인도양을 누볐을 때조차, 제국은 곧 문을 닫아버렸다. 바다는 이익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여겼던 것이다.

*명나라 정화의 원정 : 15세기 초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환관 정화(鄭和)가 이끈 대규모 해외 탐험 및 항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약 80년가량 앞선, 세계 해양사에 중요한 사건.

정화의 항해로.jpg 정화의 항해로

그러나 닫힌 바다의 대가는 컸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광저우와 상하이를 지키지 못했다. 증기선과 함포를 갖춘 영국 해군은 속수무책의 청군을 무너뜨렸다.

아편전쟁.jpg 아편전쟁 중 영국의 네메시스호(철갑 증기함)에 파괴되는 중국 함선

바다는 평화를 주지 않았지만,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제국은 굴욕을 맛보았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도 일본 해군은 황해와 요동반도 해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또 한 번 바다에서 무너졌다.

청일전쟁 주요전투.jpg 청일전쟁 주요 전투

20세기에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군은 중국의 전함들을 물리치고 상하이 해안을 통해 밀려들었다. 바다는 다시 침략자의 길이 되었고, 중국은 내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파괴된 중국전함.jpg 중일전쟁 중 파괴돈 중국 전함(핑하이), 일본은 중일전쟁의 전리품으로서 민간에 전시

오늘날 중국은 이 굴욕의 과거를 뒤집으려 한다.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건설하고, 푸젠함 등 최신 항공모함 세척을 운용하며 제해권 확보를 시도한다. 과거 패배했던 바다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여전히 쉽지 않은 공간이다. 미국, 일본, 동남아 국가들과 얽힌 남중국해 갈등은 바다가 단순한 국경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갈림길임을 보여준다.

푸젠함.png 시험 운행 중인 푸젠함

중국의 서쪽은 높고 험하다. 히말라야와 파미르, 톈산 산맥이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막고 있다. 남쪽의 고원과 북쪽의 사막은 왕조들에게 자연의 요새였지만 동시에 고립의 벽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다’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길이었고, 오아시스 도시만이 실크로드를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중국의 산맥과 사막.jpg 중국의 산맥과 사막

북쪽은 달랐다. 몽골 초원에서 기마민족들이 끊임없이 남하했다. 기원전 3세기 흉노가, 13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몽골군이 이 초원을 타고 중국으로 내려왔다. 만리장성은 바로 이 두려움의 산물이었다. 중국인들은 장성을 따라 성벽을 쌓으며 끝없는 침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장성도 완전한 방패는 되지 못했다.

칭기즈칸의 정복로.png 칭기즈칸의 정복로

근현대에도 내륙은 전쟁의 무대였다. 1962년, 히말라야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에서 중국과 인도는 국경 전쟁을 벌였다. 좁은 고지대와 험한 협곡은 전투를 치열하게 만들었고, 중국군은 빠른 기동으로 인도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졌고, 국경은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다. 산맥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전장의 배경이었다.

히말라야분쟁.jpg 히말라야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 2013년 충돌 지속

중국 문명의 뿌리는 황하 평야였다. 황하는 비옥한 흙을 남겼지만, 수없이 범람해 수만 명을 삼키곤 했다. 그래서 ‘중국인의 슬픔’이라 불렸다. 하지만 이 강 덕분에 북중국 평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농경지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황하2.png 중국의 황하의 상징적인 폭포 (청록색과 갈색 물이 극적으로 합쳐지는 모습)

남쪽의 장강은 또 다른 젖줄이었다. 풍부한 수량과 따뜻한 기후는 중국을 세계 최대의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강은 문명만 키운 것이 아니라 전쟁도 낳았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 수많은 전쟁은 강과 운하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갈렸다. 수송로를 확보한 국가는 병참을 지배했고, 곧 패권을 장악했다.

중국의 주요 하천.jpg 중국의 주요 하천

1851년부터 1864년까지 이어진 태평천국 운동도 장강 유역에서 불타올랐다. 반란군은 남북을 잇는 통로를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청군이 강의 지배권을 되찾자 반란은 꺾였다. 장강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전장의 중심이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도 장강은 중요한 경계였다. 국민당군은 장강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인민해방군은 이를 돌파하며 남쪽을 점령했다. 강은 다시 한번 정권의 흥망을 결정지었다.

중국 국공내전 도하하는 공산당.jpg 국공내전, 장강을 도하하는 인민해방군

중국의 평야는 방어할 산맥이 없는 만큼 하늘도 열려 있었다. 1937년 난징 대학살 직전, 일본군은 중국 내륙 깊숙이 폭격기를 보냈다. 도시들은 속수무책으로 불탔고, 중국은 공중 방어의 취약함을 절감했다.

난징 대학살 폭격하는 일본 전폭기.jpg 난징 대학살 전 중국을 폭격하는 일본 전폭기

냉전 이후 중국은 공군력 강화에 나섰다. 러시아제 전투기를 도입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스텔스 전투기 J-20을 개발했다. 대만 해협, 동중국해, 남중국해는 언제든 공중 충돌이 벌어질 수 있는 긴장된 공간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하늘을 지배하지 않고서는 바다도, 평야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 J20 전투기 편대.jpg 중국 5세대 스텔스기 J-20 편대

중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 여겼다. 그러나 1842년 난징조약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제국은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 굴복해야 했고, 1895년 청일전쟁 패배는 동아시아 패권을 일본에 내주었다.

중국 근대화 시기 굴욕의 조약.png 중국 근대화 시기 주요 조약

1949년 건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세계에 섰다. 그러나 1972년 미중 수교는 외교 지형을 바꿔놓았다.

미중수교.jpg 1972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한 것은 냉전 질서의 변동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

이후 개혁개방과 경제 성장 속에서 중국은 다시 세계의 중심을 향했다. 오늘날 중국은 미국과 경쟁하며, 러시아와 협력하고,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영향력을 넓힌다.


중국의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 황하는 여전히 흐르고, 히말라야는 여전히 높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장강과 황하의 수량을 바꾸고, 식량 안보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바다는 여전히 국제 갈등의 무대이고, 하늘은 드론과 사이버전으로 새로운 전장이 되고 있다.


중국은 과거에 당한 패배를 기억하며, 해군력과 공군력, 사이버 안보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래의 중국 전략은 단순한 영토 방위가 아니라, 강과 바다, 하늘과 사이버 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 전력에 달려 있다.

중국의 지리 그림.jpg 중국의 하천, 산, 평야, 하늘

중국의 역사는 산맥과 사막, 강과 바다, 평야와 하늘이 만들어낸 전쟁의 역사였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의 굴욕, 1937년 중일전쟁에서의 고통, 1962년 중인전쟁에서의 충돌, 그리고 오늘날 남중국해에서의 긴장은 모두 지리에서 비롯되었다.

남중국해 분쟁지역.jpg 남중국해 분쟁지역

중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시아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한 자만이 지켜낼 수 있다.

중국지리.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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