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의 안갯속에서 피어난 전쟁과 평화
베트남은 지도의 남쪽 끝, 길게 뻗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중국을 향해 있고, 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굽이치며, 꼬리는 남중국해의 물결 속에 잠긴다. 산맥과 강, 바다와 밀림이 서로 뒤엉킨 땅. 그 위에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싸우고, 또다시 일어섰다. 이 땅의 바람은 언제나 방향을 바꿔왔다. 북쪽에서 불면 전쟁이었고, 남쪽에서 불면 무역이었다. 동쪽의 바다에서 불면 침략이었고, 서쪽의 산에서 불면 독립이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곧 바람의 역사였다.
1. 남중국해의 문, 외세가 드나든 바다 길
베트남의 해안선은 무려 3,200km. 바다는 언제나 친구이자 적이었다. 북쪽의 통킹만에서 남쪽의 깜라인만까지, 해안은 얇은 띠처럼 이어지지만 그 속에는 수천 년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7세기, 중부의 참파 왕국(Champa Kingdom)은 향신료와 진주로 번영을 누렸다. 그들은 뛰어난 해상술로 인도와 교역했고, 남중국해를 가로지르며 문화를 전했다. 하지만 북쪽의 다이베트 왕조(Dai Viet)가 남하를 시작하자, 참파의 항구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1471년, 다이베트의 레탄통 왕이 참파를 멸망시키면서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바다의 패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 바다는 곧 외세의 문이 되었다.
1858년, 프랑스군은 증기선과 신형 함포를 앞세워 다낭 항구를 점령했다. 불과 몇 년 뒤, 사이공(오늘날의 호찌민)이 함락되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침공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산업화된 서구의 무기가 농경 사회를 제압한 사건이었다. 철과 화약, 그리고 증기의 힘이 천 년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이다.
1세기 후, 또 다른 외세가 그 바다를 건넜다. 1965년, 미군은 남베트남에 다낭 해상·공중기지를 건설했다. 항공모함이 해안을 덮고, B-52 폭격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다낭은 그때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 바다의 역사에는 한 가지 진리가 있었다. 무기로 지배한 자는 언젠가 그 바다를 떠났지만, 땅에 뿌리내린 자는 끝내 남았다. 바다는 잠시 빼앗길 수 있었지만, 결코 잊히지 않았다. 오늘날 베트남 해군은 스프래틀리 군도와 파라셀 제도를 순찰한다.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은 과거의 전쟁을 새로운 형태로 되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다. 베트남은 지키는 쪽이다. 그들의 함정은 파도를 거슬러 달리고, 그들의 깃발은 바람을 가르며 휘날린다.
2. 전쟁의 교과서가 된 산맥과 밀림
베트남의 70%는 산이다. 그중에서도 안남산맥(Annamite Range)은 베트남의 척추이자, 역사를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이 산맥은 중국의 윈난성에서 시작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뻗는다. 그 험준한 지형은 외세에겐 악몽이었고, 베트남인에게는 방패였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식민군은 이 산맥을 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평야를 점령했고, 도시를 세웠다. 그러나 산속에는 새로운 전사가 자랐다. 그들은 호찌민(Ho Chi Minh)의 이름 아래 뭉쳐, 독립군 베트민(Viet Minh)을 조직했다.
1954년, 북부 산악지대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프랑스군은 계곡의 한가운데 요새를 구축했다. 최신 무기와 항공 지원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베트민은 1만 대의 자전거로 수백 톤의 탄약을 산 위로 끌어올렸다. 그들은 산을 도로 삼았고, 계곡을 포위했다. 56일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 1만 명이 항복했다.
이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식민주의의 종언을 알린 사건이었다. 총보다 지형이, 제국보다 민중이 강하다는 것을 세계가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 20년 후, 또 다른 전쟁이 같은 산맥에서 반복됐다.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었다. 미군은 정글을 태우고, 폭탄을 뿌렸지만, 밀림은 다시 자라났다. 게릴라들은 호찌민 루트라 불린 산악 보급로를 따라 남으로 이동했다. 그 길은 1만 km가 넘는 비밀의 통로였다. 나무로 덮인 길 아래에는 수백 개의 터널과 은신처가 있었고, 그 위를 B-52 폭격기가 아무리 지나가도 길은 다시 열렸다. 이 산맥은 결국 한 가지 진리를 남겼다. “하늘을 지배한 자가 이기지 못한 유일한 전쟁.”
3. 생명의 강, 전쟁의 강
베트남은 두 개의 큰 강이 나라를 가른다. 북쪽의 홍강(Red River), 남쪽의 메콩강(Mekong River)이다. 홍강 델타는 베트남 문명의 발상지다. 기원전 3세기, 락비엣 왕국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평야는 비옥했지만 동시에 중국군의 남하 통로였다. 천 년 동안 베트남은 중국의 속국으로 지냈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싸웠다. 홍강의 진흙은 농부의 손과 병사의 피를 함께 품었다.
메콩강 델타는 남쪽의 젖줄이었다. 이곳은 쌀과 생선이 풍부한 평야이지만, 전쟁이 나면 병참선이 되고, 침략이 나면 함정이 된다. 1968년, 미군은 ‘메콩 델타 작전(Operation Sealords)’을 개시했다. 강과 운하를 따라 수백 척의 보트와 헬리콥터가 움직였고, 베트콩의 수상기지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정글과 늪은 미군의 기술력을 삼켜버렸다. 게릴라들은 밤마다 강을 건너 나타났고, 강물은 다시 그들의 편이 되었다. 강은 베트남의 심장이다. 문명을 키우고, 침략을 막고, 전쟁을 견뎌낸다. 흐르는 물은 멈추지 않고, 그 물 위에 사람들은 다시 논을 일구었다.
4. 폭격의 시대, 꺾이지 않은 하늘의 날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하늘은 베트남의 적이었다. 미군은 ‘롤링 썬더 작전(Rolling Thunder)’을 개시하며, 하노이와 하이퐁을 초토화시켰다. B-52 폭격기, 네이팜탄, 그리고 오렌지제초제. 이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내렸다. 그러나 땅은 꺾이지 않았다.
베트남은 하늘 아래를 파고들었다. 지하에는 학교, 병원, 공장이 생겼고, 하늘 위에는 소련제 미그(MiG-21) 전투기가 떠올랐다. 하노이의 젊은 조종사들은 방공포화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하늘을 빼앗기지 않으려 싸웠고, 하늘은 결국 침묵했다. 1972년 12월, 미국은 ‘라인배커 2 작전(Linebacker II)’으로 열흘간 20,000톤의 폭탄을 투하했지만, 북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해 1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하늘의 폭격은 전쟁을 끝내지 못했고, 결국 사람의 의지가 전쟁을 끝냈다.
4. 강대국의 바람 속을 걷는 외교 지리
전쟁이 끝나자,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외교였다. 1975년 통일 이후,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를 택했다. 그러나 곧 중국과의 국경 분쟁(1979년 중월전쟁)이 터졌다. 중국군이 북부로 침공했지만, 베트남은 그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 전쟁은 단 한 달이었지만, ‘아시아의 형제전’이라 불릴 만큼 이념보다 지리의 갈등이 컸다.
이후 베트남은 소련과 동맹을 맺었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또다시 홀로 섰다. 그들은 이번엔 서쪽을 향했다. 1995년, 미국과의 수교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30년 전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두 나라가, 이제 경제와 안보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베트남의 외교는 줄타기다.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 일본, 한국과 협력을 넓힌다. 남중국해의 영유권 문제에서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대화를 잃지 않는다. 그것이 베트남식 외교다. 싸우되, 살아남는 방법.
5. 미래는 기술과 자원 확보 전쟁
이제 전쟁은 없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기술과 자원의 전쟁이다. 호찌민의 젊은 세대는 총 대신 키보드를 잡았고, 공장에서, 연구소에서, 스타트업에서 새로운 전장을 연다. 베트남 해군은 잠수함과 초계기를 확충하며 남중국해에서의 주권을 지키고 있다. 공군은 러시아제 수호이와 국산 무인기를 결합한 신형 공중전 체계를 구축 중이다. 이제 그들은 지리의 희생양이 아니라, 지리를 무기로 바꾸는 세대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의 산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강은 여전히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 위를 나는 것은 이제 새가 아니라 위성이다. 베트남은 이제 밀림의 전사가 아니라, 데이터 시대의 개척자다.
안개의 나라, 의지의 사람들 안남산맥 위로 안개가 내린다. 그 안개는 과거의 전쟁을 가리고, 새로운 아침을 연다. 그들은 싸워서 독립을 얻었고, 버텨서 나라를 세웠으며, 이제 배우고 만들어서 미래를 향한다. 베트남은 상처로 성장한 나라다. 총 대신 농기구를, 폭격 대신 위성을 품은 나라. 그들의 땅은 여전히 불균형하고, 기후는 거칠며, 바다는 불안정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더 단단하다.
“지리가 전쟁을 만들었지만, 의지가 평화를 만들었다.” 그 말처럼, 오늘의 베트남은 밀림의 안갯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의지,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생존 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