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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7. "인도" 히말라야의 벽, 인도양의 숨결

by 김장렬
인도지리.png 인도의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인도를 바라보면 한 나라가 아닌, 거대한 대륙이 한 껍질 아래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이 든다. 아침 햇살이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금빛으로 감싸고, 저녁의 붉은 공기는 인도양 위에 느리게 가라앉는다. 이 나라의 국경선은 하나의 선이 아니라, 대륙 생태계의 경계이자 문명권의 전선이었다.


북쪽에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맥, 히말라야가 벽처럼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이 만든 신화 같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서쪽에는 타르 사막, 동쪽에는 벵골만과 미얀마의 정글이 이어진다. 남쪽은 거대한 물결이 인도 대륙을 감싸듯 인도양이 둘러싼다. 인도는 이런 자연의 손바닥 위에서 문명을 키워왔다.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강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는 이미 도시 계획, 배수시설, 표준화된 도량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Mohenjo-daro.jpg 모헨조다로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

세계 4대 문명이라 불리는 이 문명의 흔적은 “강은 문명을 만든다”는 진실을 이 땅에 새겨 놓았다. 이렇듯 인도는 태초부터 지리가 운명을 만든 땅이었다. 바람, 강, 산, 바다가 서로 맞물리며 수천 년의 전쟁과 교류, 신앙과 투쟁을 만들어 왔다. 그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 본다.


1. 인도양이 만든 제국과 전쟁


인도의 해안선은 길다. 서쪽 아라비아해에서 동쪽 벵골만까지, 이어도처럼 보이지 않는 곡선을 따라 7,500km가 펼쳐진다. 그 길 위에 바람은 향신료 냄새를 싣고, 파도는 낯선 나라의 배를 실어왔다. 촐라 제국의 바닷길은 인도 해양의 꿈이 시작되었다.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 타밀 지역에서 성장한 촐라 제국(Chola Empire)은 인도 역사에서 드물게 해상력을 앞세운 나라였다.

촐라.png 촐라 제국 영토 (출처 : https://www.reddit.com/r/IndiaSpeaks/comments)

그들은 오늘날의 스리랑카를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항로를 열었고, 자신들의 무기와 조선 기술을 바다 너머로 보내며 “인도양의 주인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 시절의 항해는 단순한 교역이 아니었다. 문자를 전하고, 종교를 전하며, 때로는 전쟁을 가져갔다. 촐라의 배가 바다를 가르며 나아갈 때, 인도양은 고요한 물길이 아니라 열린 문명지대였다.


바다로 들어온 침략자들로 인해 식민지의 서막이 열린다. 16세기 유럽의 배들은 향신료 냄새를 따라 인도 해안에 닿았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깃발이 순서대로 들어와 해안도시를 점령하고 요새를 세웠다. 고아, 본베이(오늘날의 뭄바이), 마드라스는 모두 바닷길로 이어지는 식민의 통로였다. 이 해안은 오래도록 외세의 발자국을 받아내야 했다. 그러나 이 해안은 동시에 인도의 저항이 일어선 곳이기도 했다.


1961년 고아 해방전쟁은 바다 위에서 주권을 되찾는 사건이었다. 포르투갈이 고아를 400년 가까이 지배하고 있을 때, 인도는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이 지역을 해방시켰다. 이 짧지만 강렬한 전투는 “바다는 더 이상 외세의 항로가 아니다”라는 선언이었다. 인도는 해양전략의 기둥을 다시 세웠다.

고아지역.png 고아 해전쟁 지역(적색)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nnexation_of_Goa)


오늘날 인도가 바라보는 바다의 중심에는 말라카 해협이 있다. 세계 해상 교역의 40%가 지나가는 이 좁은 길목은 인도뿐 아니라 한국에게도 생명선이다. 대한민국이 수입하는 석유의 대부분이 이 해협을 지나며, 이 길이 막히는 순간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숨을 쉴 수 없다. 그래서 인도는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해군기지를 두고 중국의 인도양 진출과 맞서는 중이다. 인도양은 다시 한번 세계 전략의 중심이 되었다.

image05.png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해군기지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2. 히말라야의 벽과 사막의 바람


인도의 내륙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침략을 막아낸 방패이자 때로는 전쟁을 부른 무대였다.

히말라야 — 너무 높은 벽,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방패 히말라야 산맥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침입자들을 막는 천연 요새였다. 그러나 그 높은 벽에도 틈은 있었다.

인도히말라야.jpg 인도 히말라야 산맥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Indian_Himalayan_Region)

카라코람 고원과 라다크 지역의 갈라진 능선은 늘 분쟁의 불씨였다. 1950년대 말, 중국과 인도의 국경 갈등은 결국 1962년 인도-중국 전쟁으로 폭발했다.

인동중국 전장.jpg 중국과 충돌하는 라타크 지역 (출처 :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950090.html)

해발 4,000m가 넘는 눈부신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산보다 더 높이 쌓인 오해와 불신의 싸움이었다. 인도는 이 싸움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고, 그 이후 히말라야는 단지 자연의 벽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최전선이 되었다.


히말라야 서쪽의 카슈미르는 아름답고도 잔혹한 분쟁의 골짜기이다.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모두 품으려 한 땅이다. 1947년 분리독립 이후 두 나라는 세 번의 전쟁을 치렀고, 1999년에는 카라길의 험준한 능선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그곳에서 병사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찾기도 어려운 높이에서 싸웠다. 이 전쟁들은 모두 카슈미르의 지리에서 비롯되었다. 아름다움과 전략적 가치가 겹쳐 있는 그 골짜기는 지금도 남아시아의 화약고다.

카수미르.png 카슈미르 지역 (출처 : https://namu.wiki/w/%EC%)


3. 문명을 길러낸 흙과 물


인도를 흔히 ‘강의 나라’라고 한다. 갠지스, 브라마푸트라, 인더스 세 강이 흘러가며 천년의 문명과 수많은 전쟁을 만들었다. 갠지스 강은 신성함이 문명을 만들다. 강가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순례객들은 강물에 몸을 담그며 삶과 죽음을 다시 바라본다. 이 강이 만든 비옥한 평야는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1년)의 토대가 되었고 아쇼카 대왕은 이곳에서 대제국을 일구었다. 문명은 강에서 태어나 평야에서 자랐다.

600px-갠지스강_위치.jpg 갠지스 강 (출처 : https://wiki1.kr/index.php/%)

인더스 강은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 중 하나를 품었다. 그 물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하라파의 벽돌과 모헨조다로의 도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문명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선이 되었다.

image06.png 인더스 강 (출처 : https://namu.wiki/w/%EC)

평야는 군대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여기는 침략과 방어가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무대가 되었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그는 인더스 강을 넘어왔고, 인도 북서부의 왕 포루스와 맞섰다. 전쟁은 인더스의 물길 위에서 이루어졌고, 그 전투는 동서 문명이 처음 충돌한 순간이었다. 이 전투는 인도를 정복하지 못했으나, “강이 만든 방어선”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세계에 보여주었다.

img.jpg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경로 (출처 :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5%87-67)

1192년, 타라인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고르 왕조와 인도 라지푸트 연합군이 갠지스 평야에서 충돌했다. 말과 활을 앞세운 이슬람 세력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델리 술탄국을 세웠고, 이 사건은 인도 북부에 이슬람 왕조 시대(약 600년)를 열었다.

타라인전투.jpg 티라인 전투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Battle_of_Tarain)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이끄는 군대는 화포를 이용해 인도 북부의 기존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해 파니파트에서 울려 퍼진 대포 소리는 무굴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탄생을 알렸다.


image03.png 파니파트 지역 (출처 : 구글 지도)

이 세 전쟁은 서로 시대도 군대도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평야는 가장 개방된 전쟁터였고, 이 공간을 장악하는 자가 인도 북부를 지배했다. 전쟁의 개요와 결과가 모두 평야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다. 평야는 국경이 아니라 열려 있는 길이었고, 그 길은 늘 제국을 시험했다.



4. 핵, 우주, 그리고 새로운 전략


핵을 가진 나라의 하늘, 1974년 인도는 첫 핵실험을 했다. 이후 1998년 포크란 사막에서 다시 핵실험이 성공하며 인도는 “비공식 핵보유국”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

image08.png 1974년 핵실험 현장 방문한 인디라 간디 총리 (출처 :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그 하늘 위에는 이제 핵 투발 능력과 미사일 방어체계가 동시에 떠 있다. 우주로 확장된 인도의 전략 인도는 우주에서도 발자국을 남겼다. ISRO는 2014년 화성 탐사선 ‘망갈리안’을 성공시켜 “가장 적은 비용으로 화성에 도착한 나라”라는 기록을 세웠다.

image09.png 화성 탐사선 ‘망갈리안’ (출처 : https://namu.wiki/w/%EB%)

2023년, 찬드라얀 3가 달 남극 착륙에 성공하면서 인도는 우주 경쟁의 새로운 주자가 되었다. 전투기와 하늘의 자존심 인도는 프랑스의 라팔, 자체 개발 전투기 테자스를 운용하고 있다. KF-21 보라매와의 협력 가능성도 연구되고 있으며, 방산 자주권을 향한 긴 여정이 이어지고 있다.

MYH20230912016000641_P4.jpg 찬드라얀 3, 달 남극 착륙에 성공 (출처 : https://www.yna.co.kr/view)


5. 비동맹의 전통과 전략적 자율의 외교


인도 외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냉전기부터 지금까지 비동맹 외교의 상징이었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수카르노, 네루는 “강대국 사이의 균형”을 선언했고, 인도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전략은 달라졌다. 중국의 부상, 인도양의 긴장, 히말라야 국경 갈등이 겹치면서 인도는 QUAD(미·일·호·인)의 핵심 국가가 되었다. 비동맹의 정신은 남아 있지만, 안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계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역시 넓어지고 있다. 삼성·현대차·K9 자주포·반도체 협력은 양국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있다.

PAP20230520251101009_P4.jpg QUAD(미·일·호·인) 정상들 (출처 : https://www.yna.co.kr/view/AKR20230520044652073)


6. 미래 인도양 시대의 주역


인도의 미래는 세 갈래의 길로 이어진다. 인도양의 중심국가 말라카 해협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이어지는 해상로는 21세기 세계 경제의 심장이다. 인도는 이 길을 지키며,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단호하게 중국과 미국 사이의 균형을 만든다.

젊은 인구와 거대한 시장 14억 인구, 평균 28세. 젊은 인구는 국가의 힘이 되고 세계 기업들이 인도에 눈을 돌리는 이유다.

기술과 우주로 향하는 문명국가 우주개발, 반도체, 방산, 인공지능 등 인도의 힘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우주로 뻗어 나가고 있다.

image10.png 미래 인도 개념도 (출처 : https://brunch.co.kr/@c531a448d906447/464)


인도의 해안에서는 파도가 오래된 돌을 두드리고, 히말라야의 바람은 조용히 산맥을 깎아낸다. 갠지스 강에서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카슈미르의 골짜기에서는 아직도 분쟁의 연기가 가물거린다. 이 모든 풍경 위에서 인도는 오래된 질문을 되묻는다. “지리는 우리의 운명을 만들지만, 우리는 그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인도의 대답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히말라야의 벽처럼 단단하게, 인도양의 물결처럼 넓고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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