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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8. “파키스탄” 산맥과 평야가 부른 전쟁

by 김장렬
파키스탄의 지리.png 파키스탄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새벽의 카라코람 산맥은 아직 잠든 거인의 어깨처럼 검고 무거웠다. 햇빛은 산을 천천히 더듬어 내려오고, 얇은 얼음막이 깨지듯 빛이 능선을 스치면 그제야 세상이 깨어나는 듯했다. 멀리 히말라야의 하얀 봉우리는 말 없는 신의 눈처럼 광채를 뿜었고, 그 아래로는 인더스 강이 고대부터 이어온 길을 따라 조용히 흘렀다. 이곳에서 바람은 늘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북쪽의 빙설 냄새를, 어떤 날은 사막의 뜨거운 숨을, 어떤 날은 인도양에서 일어난 먼 폭풍의 냄새를 실어 왔다. 그 바람 안에 파키스탄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산맥이 만든 운명, 평야가 불러온 침략, 바다가 열어둔 희망. 이 세 겹의 지리가 이 나라의 전쟁과 평화를 결정해 왔고, 지금도 그 바람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한 나라의 운명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땅이 만들었는가, 사람이 만들었는가?” 파키스탄의 이야기는 그 질문의 답을 찾는 여정이다.


1. 세계의 지붕 아래서 벌어진 싸움


파키스탄의 북부는 지구에서 가장 극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히말라야, 카라코람, 힌두쿠시가 한데 얽인 땅에는 세계 14좌의 고봉 중 5개가 자리 잡고 있다.

산맥.png 파키스탄의 산맥 (출처 : https://namu.wiki/w/%EC%B9%B4%)

K2는 바람조차 마음대로 지나가지 못하는 봉우리였고, 낭가파르바트는 “살인산”이라 불리며 수많은 이들의 도전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곳에서 무너진 것은 알피니스트(Alpinist)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산맥은 국가의 운명을 가르고, 전쟁의 선을 그었으며, 군인들의 숨소리가 눈보라 속에 묻히는 전쟁터가 되었다. 1962년 인도와 중국이 충돌한 전쟁은 바로 이 산악지대에서 피어올랐다.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라다크와 아루나찰프라데시에서 양국 군대는 고도 3,000~5,000미터의 능선 위에서 싸웠다. 그 전쟁은 짧았지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파키스탄은 그 상황을 지켜보며 북부 산악지대의 전략적 가치가 얼마나 큰지 다시 확인했다. 파키스탄이 가장 뼈아프게 기억하는 전투는 1999년 카슈미르 지역의 카르길이었다. 파키스탄군과 준군사조직은 히말라야 능선을 미리 점령했고, 인도군은 산을 따라 한 걸음씩 다시 올라가야 했다. 고지에서는 산소보다 총알이 더 빠르게 소비됐고, 빙벽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들의 비명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 전쟁은 핵보유국끼리의 충돌이었다. 세계는 숨을 죽였다.

카수미르.png 끊이지 않는 카슈미르 지역 분쟁 (출처 :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50509/131575480/3)

히말라야는 그 순간, 전쟁의 공간이자 핵의 그림자가 드리운 무대가 되었다. 산맥은 파키스탄에게 방벽이지만, 동시에 책임이었다. 산이 막고 있는 것은 단지 바람이 아니라 수천 킬로미터에 걸친 국경 분쟁과 외세의 관심이었다. 파키스탄이 늘 경계의 나라로 살아온 이유는 이 거대한 산들의 침묵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2. 전쟁을 부른 평야의 길


파키스탄의 동부 펀잡(Punjab) 평야는 인더스 강과 다섯 개의 지류가 만들어낸 거대한 비옥 지다. 평야의 숨결은 너그럽지만, 그 너그러움이 늘 평화를 부른 건 아니었다. 평야는 항상 열려 있다. 막아설 벽이 없고, 군대가 움직이기 쉬운 길이었기에 수천 년 동안 제국들은 이곳을 통해 남쪽으로, 북쪽으로, 그리고 서로에게 달려갔다.

펀자브.png ㅓ파키스탄 펀잡 (출처 : https://namu.wiki/w/%ED%8E%80%EC)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 강에 이르렀을 때,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었지만 질서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순간, 서양의 군대는 처음으로 거대한 인도 문명을 마주했다. 포루스 왕과의 전투는 승패보다 더 큰 의미를 남겼다. 인더스 강의 깊이와 평야의 규모는 더 나아갈 수 없는 ‘자연의 경계’였다. 이후 이슬람 왕조들의 진출도, 티무르의 후손들이 이룬 무굴제국도 모두 이 평야를 지나 제국을 세우고 지배했다. 평야는 제국의 요람이었고, 전쟁의 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 평야의 전쟁은 더욱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다. 1947년 영국이 떠난 직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당연하게도 펀잡 평야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열린 지형 덕분에 전선은 빠르게 변화했고, 양국은 정규군을 재정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혼란 속에서 싸웠다. 이 전쟁은 국경을 확정하지 않은 뒤떠남의 대가였다.

제1차 파키스탄 인도 전쟁.jfif 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출처 : https://rhdqngkqtlek.tistory.com/46)

1965년 전쟁은 더 체계적이고 치열했다. 양국은 수백 대의 전차를 동원해 사람이 살지 않는 평야 위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세상은 두 핵심 문명의 충돌을 바라보며 이 전쟁이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지리적 운명이 낳은 반복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평야는 파키스탄의 풍요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대문처럼 열려 전쟁이 먼저 달려오는 길이 되었다. 역사는 자주 그 길을 사용했다.


3. 고립과 저항의 땅 사막


파키스탄 서부의 발루치스탄은 끝없이 펼쳐진 건조한 고원, 황량한 바람, 그리고 부족사회가 지켜온 고립의 땅이다. 사막의 바람은 오래된 분노를 품고 있다. 지리는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기 어렵게 만들었고,

분리주의와 무장 저항은 이곳에서 반복됐다.

발루치스탄.png 발루치스탄 (출처 : https://namu.wiki/w/%EB%)

이 지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국경과 연결되어 있어 각국의 영향력이 뒤섞여 작용한다. 최근에는 탈레반의 흔들림과 IS-K의 그림자까지 퍼지고 있다. 사막은 파키스탄에게 영토였지만, 그것은 늘 관리해야 하는 과제였다. 지리는 보호막이 되지 않을 때, 국가의 가장 큰 고민을 남긴다.


4. 짧지만 치명적인 해안선


파키스탄은 길지 않은 1,000km의 해안선을 가졌지만 그 가치는 육지보다 훨씬 컸다. 카라치 항구는 국가의 심장이었고, 과다르 항구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이었다. 파키스탄이 바다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은

1971년 전쟁이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오늘의 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 사이에는 1,500km의 인도 영토가 있었고, 서파키스탄은 동부를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인도 해군은 벵골만을 봉쇄했고,

동파키스탄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해상 봉쇄는 방글라데시 독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파키스탄은 바다가 국가 분단을 가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절감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png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출처 : https://namu.wiki/w/%EB%B0%A9%EA%)

오늘의 파키스탄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협력한 과다르 항구–CPEC(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사업은 중국에게는 인도양 접근을, 파키스탄에게는 경제적 생명줄을 의미한다. 바다는 파키스탄에게 미래였다. 육지에서 반복되는 전쟁의 기억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었다.


5. 인더스 강이 만든 문명과 국가


파키스탄의 국기는 초승달과 별을 품고 있지만, 이 나라의 실질적인 생명은 초승달이 아니라 인더스 강이었다. 인더스 강은 파키스탄의 정치·경제·문명을 모두 연결하는 줄기였다. 고대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 문명 중 가장 오래된 배수시설과 도시계획을 가진 도시였다. 그 유산은 파키스탄인들의 심리 깊은 곳에 남아 “강이 있는 곳에 문명이 있다”는 확신을 만들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인더스 강은 전쟁의 동맥이었다. 군대는 강을 따라 이동했고, 도시들은 강에 의존해 성장했다. 지리는 파키스탄의 모든 것을 강 위에 두었다.

인더스강_지리.jpg 인더스 강 (출처 : https://wiki1.kr/index.php/%ED%8C%8C%EC%9D)


6. 핵의 그림자 아래에서 열린 전략


파키스탄이 하늘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긴박했다. 1998년 핵실험을 감행한 뒤,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핵 억지 전략을 구축한 나라가 됐다. 지리는 핵을 선택하게 했다.

파키스탄 핵 개발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jpg 파키스탄 핵 개발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39412)

평야는 너무 열려 있었고, 산맥은 너무 넓게 갈라져 있었으며, 바다는 아직 힘이 부족했다. 하늘은 가장 직접적인 억지의 공간이었다. 2019년, 인도 공군이 발라코트 지역을 타격했을 때 파키스탄은 F-16을 출격시켜 대응했다. 핵보유국끼리의 공중전이라는 희귀한 장면은 세계에 긴장된 메시지를 던졌다. 하늘은 이제 단순한 군사 공간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결정하는 최대의 전략 공간이었다.

그림5.png 2019년 인도-파키스탄 공중전 당시 격추된 인도 전투기 (출처 : https://m.blog.naver.com/rgm84d/222068071812)


7. 균형 위에 선 외교


파키스탄의 외교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그 뿌리는 단순하다. “산맥은 중국과 연결하고, 평야는 인도와 충돌시키며, 바다는 미국과 중동으로 이끈다.” 이 세 방향의 지리가 파키스탄의 외교 전략을 결정한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경제·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미국과는 테러 대응을 명분으로 협력을 유지하며, 러시아와는 군사 장비 분야의 관계를 이어가고, 중동(특히 사우디·UAE)과는 노동·경제 관계로 엮여 있다. 파키스탄 외교의 핵심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대지 않는 균형이다. 균형은 선택이 아니라 지리가 만든 필연이었다.

그림6.png 파키스탄의 균형 외교


8. 지리가 남긴 상처, 지리가 열어줄 미래

파키스탄의 미래는 산맥과 평야와 바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긴장된 밧줄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긴장은 위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산맥은 중국과 연결된 경제 회랑(CPEC)을 만들었고, 평야는 젊은 인구의 활력을 키웠으며, 바다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의 문을 열어주었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분쟁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그 지리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저녁이 되면 인더스 강은 태양을 품고 붉게 물들었다. 강은 오늘도 북쪽의 히말라야에서 내려온 물을 싣고

남쪽의 바다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파키스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파킨스탄으,ㅣ 자연.jpg 파키스탄의 자연 (출처 :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s-g293959-Activities-c57-Pakistan.html)

“우리는 산에 막혀도, 평야에서 쓰러져도, 바다로 나아갈 길을 찾았다. 지리는 우리의 운명을 시험했지만,

그 시험 속에서 우리는 계속 걸어왔다.” 그리고 바람은 그 위에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지리가 운명을 만들지만, 그 운명을 버티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 말은 파키스탄의 과거였고, 현재이며, 미래였다.

파키스탄의 지리.png 파키스탄의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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