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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10.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의 방패, 바다의 길, 석유라는 무기

by 김장렬
사우디 지리.jpg 사우디아라비아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사막의 아침은 늘 조용하다. 몸을 숨길 그늘도, 소리를 막을 숲도 없다. 태양은 어김없이 수평선 위로 떠올라, 붉은 모래를 금빛으로 바꾸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런 사막 위에서 태어난 나라였다. 사람과 낙타를 덮어버릴 듯한 모래의 바다, 그 위에 드문드문 솟은 바위산,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지형마저 흔들릴 것 같은 공간. 그러나 이 땅은 결코 고립된 모래 바닥이 아니었다. 서쪽에는 긴 홍해가 있었고, 동쪽에는 페르시아만이 열려 있었다. 두 개의 바다, 두 개의 문이 사우디를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사막은 외세를 거부하며 이 나라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1. 사막이 만든 나라의 시작


아라비아반도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이 거대한 국토에는 단 한 번도 큰 강이 흐른 적이 없다. 대륙을 가르는 룹알할리 사막은 인간이 발자국조차 남기기 어려운 빈 공간, 이름 그대로 “텅 빈 사막”이었다.

룹알할리사막_위치.jpg 룹알할리 사막 (출처 : https://wiki1.kr/index.php?title)

그러나 이 빈 공간은 침략자에게는 가장 높은 벽이 되었다. 사막은 병사들의 발을 잡고, 식수를 말려 죽이고,

길을 잃게 만들어 군대를 흩어놓았다. 이 땅이 한 번도 제국의 본토가 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서 나왔다. 반대로 이 사막은 사람들에게 강인함을 주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부족 사회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뭉쳤고, 그 연대는 종교적 신념과 결합해 거대한 힘이 되었다. 18세기, 와하브 운동으로 알려진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사우드 가문과 이 신념은 결합했다. 사막의 부족들이 하나의 기치 아래 모였고, 이 작은 연대가 훗날 아라비아반도를 통합한 국가의 씨앗이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 3대 가문.png 18세기 아라비아 반도의 3대 가문 (출처 : https://brunch.co.kr/@westnn777/4)


2. 해안을 가진 사막, 바다를 가진 왕국


사우디는 사막 국가이지만 두 개의 바다를 가진 기묘한 나라였다. 서쪽의 홍해는 길게 뻗어 수에즈 운하와 이어졌고, 동쪽의 페르시아만은 석유와 군사 전략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우디의 힘을 석유에서만 찾지만, 그 뿌리는 바다였다. 홍해의 항구들은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잇는 무역의 통로였고, 메카로 향하는 순례길의 중요한 경유지였다. 동쪽의 페르시아만은 더 격렬한 공간이었다. 이 작은 바다에서 이란과 사우디의 긴장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미국의 제5함대가 자리 잡은 이유도, 세계 석유의 절반이 이 바다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5함대.png 미국의 제5함대 (출처 : https://v.daum.net/v/20190619033658156)

1973년, 사우디는 욤키푸르 전쟁 당시 석유 생산을 억제하고 가격을 폭등시키며 “석유는 무기다”라는 사실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전쟁은 중동에서 벌어졌지만, 고통은 전 세계로 퍼졌다. 이것이 바다와 석유가 결합해 만든 진정한 힘이었다. 21세기 들어와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 도시와 유전을 향해 드론과 미사일을 발사했고, 2019년 아람코 정유시설이 공격을 받았을 때, 사우디는 공군과 방공체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바다는 더 이상 국경이 아니라, 취약점이기도 했다.

아람코 정유시설.jpg 2019년 아람코 정유시설이 드론 공격 (출처 :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190916/97416370/1)


3. 사막이 지킨 나라, 사막이 키운 전투


사우디 내륙에는 두 개의 상징적인 지역이 있다. 하나는 고대 상인들의 길이자 도시 문명의 중심이던 헤자즈,

다른 하나는 부족들의 본거지이자 왕국의 심장인 나즈드이다. 헤자즈 산지는 메카와 메디나를 품고 있다. 14세기부터 순례길은 이 산지와 사막을 지나며 ‘이슬람의 중심’이라는 신성한 지리를 만들어냈다. 나즈드는 넓고 험했다. 그 어떤 제국도 이곳을 완벽히 지배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도, 영국도 이곳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막은 침략을 막아냈고, 그 속에서 사우드 가문은 힘을 키웠다.

위치.png 헤자드와 나즈드 (출처 : https://namu.wiki/w/%ED% 9E%88%EC%9E%90%EC%A6%88)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라비아 반란을 지원했다. 그 중심인물이 ‘사막의 영웅’ 로렌스였다. 그는 사막에서의 전투 방식, 즉 기습과 기동을 결합한 유격전의 위력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사우디는 바로 이런 지형과 전술 위에서 자랐다. 사막은 나라를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은 그들을 자유롭게 했다.


4. 강이 없는 나라가 물을 다루는 방식


인류의 많은 전쟁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사우디에는 큰 강이 없다. 물이 없다는 사실은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근본을 뒤흔드는 현실이었다. 사우디는 수십 년 동안 거대한 담수화 시설을 건설해 바닷물을 마시는 나라가 되었다.

사우디 담수화 시설.gif 사우디 ‘라빅 3단계 독립적인 물 플랜트’ 세계 최대의 역삼투 담수화 시설 (출처 : 워터저널 https://www.waterjournal.co.kr)

이 시설들은 전쟁의 무기가 될 수도, 생명의 줄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부족한 땅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성장한다는 것은 사우디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취약한 기반 위에서 안보 전략을 구축해야 함을 의미했다.

사우디의 취약함은 사막에 있지만, 강이 없는 이 땅의 강함도 바로 그 취약함에서 나왔다.


5. 사우디의 공군이 증강되어야 하는 이유


현대의 사우디는 하늘을 중시한다. 그들이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공군력을 보유하게 된 이유는 사막의 개방성 때문이었다. 군사 기지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수 분 만에 메카, 메디나, 리야드를 모두 방어할 수 있어야 했다.

냉전 이후 사우디는 F-15 시리즈를 도입하며 공군 중심의 억지 전략을 세웠다. 후티 반군의 드론 공격, 이란의 미사일 전력 증강은 사우디에게 “공군 없이는 사막을 지킬 수 없다”는 명확한 명제를 남겼다. 사우디의 방공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지리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었다.

사우디 공군편대.jpg 사우디 공군편대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4409)


6. 성지의 지리, 종교가 만든 권력


사우디는 두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메카는 세계 이슬람의 중심이며, 메디나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잠들어 있는 도시다. 이 두 도시는 사우디를 지리적 국가가 아니라 문명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객이 이 도시에 모인다. 이 흐름은 경제가 되었고, 외교가 되었으며, 사우디 왕권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메타.png 메카와 메디나 (출처 : https://blog.naver.com/aghon/221187652161)


7. 사막이 숨겨놓은 두 번째 바다 '석유'


1938년, 다르란에서 첫 석유가 발견되었을 때 사우디는 한순간에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가와르 유전은 세계 최대의 육상 유전이 되고, 사우디의 동부는 전략적 심장부가 되었다. 1991년 걸프전이 벌어진 것은 쿠웨이트 뿐 아니라 사우디의 안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사우디 영토에서 출발했고, 이 나라의 지리는 국제전의 무대가 되었다. 석유는 사우디를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또한 세계 경제와 얽힌 전략적 책임을 안겨줬다.

사우디 유전.jpg 1938년, 다르란에서 첫 석유가 발견 (출처 :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89)


8. 모래와 바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


사우디 외교는 늘 균형 위에 서 있다. 미국과는 안보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확대한다.

이란과는 수십 년간 경쟁 관계였지만 2023년 중국의 중재로 관계 회복에 나섰다. 이스라엘과도 신중하게 접근하며 중동 질서를 새롭게 그리려 한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우디는 두 바다를 가진 나라”라는 지리적 조건이 있다.

20230613503412.jpg 사우디 삼각 외교 (출처 :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95807.html)


9. 사우디의 미래, 사막에서 도시로, 석유에서 기술로


사우디는 Vision 2030이라는 이름으로 석유 이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홍해 연안에 네옴(NEOM)이라는 거대한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소 산업과 재생 에너지에 투자한다. 군사 자립도는 방산 산업 육성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해군과 공군 모두 현대화의 길 위에 있다.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미래를 지리 위에 직접 새기는 일이다.

네옴 신도시.jpg 네옴(NEOM) 신도시 청사진 (출처 : https://www.mk.co.kr/news/realestate/10558615)

사우디의 지리는 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사막은 왜 이 나라를 지켜냈는가. 성지는 왜 이 나라의 무기가 되었는가. 석유는 왜 이 나라의 미래가 아닌가. 그리고 가장 오래된 질문은 이것이다. “사막에서 태어난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사우디는 그 대답을 바다에서 찾고 있다. 두 바다를 잇는 길, 사막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길. 과거의 침묵과 미래의 소리가 만나는 길. 사막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사우디는 거대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사우디 지리.jpg 사우디아라비아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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