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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바다가 만든 전쟁과 평화

by 김장렬
아메리카.jpg 아메리카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아메리카(the Americas)는 지구상의 초대륙이다. 서쪽에는 태평양, 동쪽은 대서양으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약 4,255만 km²로 아시아보다 조금 작으며, 인구는 약 10억 220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이 대륙은 오래도록 조용했다. 소란스러운 국경도 없었고, 서로를 겨누는 성벽도 없었다. 동쪽에는 끝없는 대서양이 있었고, 서쪽에는 태평양이 있었다. 그 바다들은 단순한 물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을 늦추는 벽이었다.

유럽이 칼을 만들고, 아시아가 성을 쌓을 때 아메리카는 바다를 얻었다. 전쟁은 이곳에 쉽게 닿지 못했고, 그래서 이 대륙의 역사는 다른 리듬으로 시작되었다. 아메리카의 지리는 처음부터 전쟁을 부르지 않았다. 전쟁은 오히려 이 대륙을 찾아와야 했다.


1. 바다가 만든 거리


아메리카는 고립된 땅이었다. 빙하기가 끝난 뒤 신생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한 육로 '베링 육교'가 사라지자, 이 대륙은 유라시아와 단절되었다.

베링육교.jpg 베링 육교 (출처 : https://wiki1.kr/index.php/)

그 단절은 수천 년간 이어졌고, 그 사이 이 땅에는 다른 방식의 문명이 자라났다. 안데스의 고원에서는 잉카가 돌길과 계단식 농업으로 산을 다스렸고, 중앙아메리카의 호수 위에서는 아즈텍이 물과 도시를 결합했다. 북미의 대평원에서는 부족들이 이동하며 땅과 싸우지 않고 공존했다. 이 문명들은 서로를 완전히 파괴하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다. 지리는 그럴 필요를 주지 않았다. 산은 방패였고, 정글은 장벽이었으며, 거리 자체가 평화를 유지하는 장치였다. 아메리카에서 평화는 조약이 아니라 접근 불가능성에서 나왔다.


2. 침략이 처음 도착한 날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도착하면서, 바다는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었다. 항로는 길이 되었고, 길은 침략이 되었다. 유럽의 배들은 금과 신을 싣고 왔고, 전염병과 철을 함께 내렸다.

콜럼버스 항해 경로.png 콜럼버스 항해 경로(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

아메리카의 첫 전쟁은 이웃과의 전쟁이 아니었다. 대륙 전체가 처음 겪는 외부 충격이었다. 이 전쟁은 빠르게 끝났지만, 상처는 오래 남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 대륙에서 서로를 직접 마주하지 않았다. 대신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쟁했다. 전쟁은 아메리카 안에서 벌어지기보다, 아메리카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3. 내부 확장의 전쟁


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싸움은 국경 전쟁이 아니라 확장의 충돌이었다. 북미 대륙의 평야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미시시피 강은 남북을 연결했고, 강을 따라 사람과 곡물, 군대가 이동했다. 이 땅에서의 전쟁은 적을 쓰러뜨리는 싸움이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는 과정이었다. 19세기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차지해야 한다는 신념인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이념을 바탕으로 루이지애나 매입, 텍사스 병합, 멕시코-미국 전쟁, 오리건 조약 등을 통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며, 원주민 이주, 골드 러시, 철도 건설, 자원 개발 등 사회·경제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미국의 서부 확장.png 미국의 서부 확장 (출처 : https://namu.wiki/w/)

이 과정은 전쟁이었지만 동시에 이주였고, 총성과 함께 철도가 놓였다. 지리는 이 싸움을 장기전으로 만들지 않았다. 공간이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1861년 노예제도 존폐와 연방 유지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남북전쟁조차도 지리가 만든 전쟁이었다. 북부는 강과 공업지대를 가졌고, 남부는 넓은 농지와 항구를 가졌다. 이 전쟁의 결말은 어느 쪽이 더 넓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지리는 승자를 정해두고 있었다.


4. 후방이 된 대륙


20세기, 세계는 두 번의 거대한 전쟁을 겪었다. 그러나 그 전쟁들은 대부분 대서양 너머에서 벌어졌다. 아메리카 대륙은 폭격당하지 않았고, 도시는 무너지지 않았으며, 공장은 멈추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의 군수공장.jpg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의 군수공장 (출처 :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779/read/40333748)

이 대륙의 지리는 전쟁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뒤에서 지켜볼 수 있게 했다. 유럽이 폐허가 될 때 아메리카는 생산했다. 아시아가 불타오를 때 아메리카는 수송했다. 이것은 도덕의 승리가 아니라 거리의 결과였다.

바다는 다시 한번 시간을 벌어주었다. 평화는 이곳에서 전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쟁이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지되었다.


5. 바다가 사라지는 시대


그러나 바다는 영원한 벽이 아니었다. 항공기와 미사일, 위성과 사이버 공간은 거리를 무력화시켰다. 아메리카의 지리는 더 이상 절대적인 보호막이 아니다. 그래서 이 대륙은 새로운 방식의 평화를 모색해야 했다. 군사력은 바다를 넘었고, 외교는 대륙을 넘어 확장되었다. 이제 전쟁은 도달 여부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가 되었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jpg 대륙간 탄도 미사일 (출처 :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00102/99048055/1)


6. 지리가 남긴 질문


아메리카는 전쟁이 적었던 대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지리의 허락이었다. 두 개의 바다는 대륙에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은 힘으로 바뀌었다. 이제 질문은 달라진다. 바다가 더 이상 벽이 아닌 시대에, 아메리카는 무엇으로 평화를 지킬 것인가. 지리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전쟁을 부르는 것도, 평화를 허락하는 것도 인간이 아니라 땅이라고. 그리고 아메리카는 그 땅 위에서 가장 늦게 전쟁을 배웠고, 가장 오래 평화를 누린 대륙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미국, 멕시코, 브라질, 캐나다, 칠레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진다. 전쟁이 없었던 땅은 왜 가장 강해졌는가. 그 답은 언제나 지도 위에 있다.

아메리카.jpg 아메리카 지리 (출처 : 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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