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떡볶이가 싫다. 정말 싫다. 적당히 묻어 살면 좋으련만, 어쩜 이런 흔해 빠진 일조차 나는 평범하지 못했는지, 가끔은 화가 났다. 무색, 무취의 질겅거리는 허연 떡에 뻘건 양념만 잔뜩 들이부은 칼로리 폭탄. 여자애들은 왜 그딴 걸 좋다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먹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친구가 없나 봐.
물론 그 ‘떡볶이’가 진짜 떡볶이가 아니라는 건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은유적 표현이겠지. 이를테면 ‘삶의 의지’ 같은 거 말이야. 내가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에 ‘라면’을 상징으로 삼은 것처럼. 아니다. 순서가 틀렸다. 내가 따라 한 거다. 나는 그 책을 읽지도 않고 제목에 꽂혔다. 그래서 나도 음식을 ‘회복’의 메타포로 삼고 싶었다. 내 대표작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 유명한 책을 왜 읽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무서웠다. 나는 글 편식이 심하고, 감정의 전염이 빠르다. 부러 줄거리조차 찾아보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내 대표작의 뿌리니까. 그런데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나도 몰랐던 거지.
그녀가 죽었다. 그제야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한참 늦은 결심이었다.
그녀는 여덟 번째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있는, 애매한 사람들이 궁금하다”고.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가 궁금해하던 그 ‘애매한 사람’이 바로 나였음을. 아주 오만하게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 생각했다.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본편으로 넘어간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멍청하고 우매한 나는 그 책의 줄거리라도 미리 살폈어야 했다.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그녀의 정신과 상담의와 마주한 나는 손이 덜덜 떨렸다. 목구멍이 왈칵 틀어막혔다. 아주 오랫동안 외면하던 상처 앞에 발가벗겨진 채 무릎이 꿇렸다.
내가 지난한 시간을 살아내면서, 그리고 그 잔재가 시시덕대며 찾아오는 매일 밤을 견뎌내면서도 병원이든 상담이든, 그 근처에 발도 들이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 같이 흔하고 나약한 이유 따위는 아니었다.
나의 정신병원 첫 방문은 일곱 살 무렵이었다. 나는 ‘정신’ 병원이 무슨 병원인지도 몰랐다. 그저 ‘병원’이라 적혀있는 그곳에 엄마의 ‘보호자’로서 동행했다. 그래, 서류상 보호자의 요건은 당연히 안되었겠지. 나는 그저 그녀의 심리적 보호자였다. 겨우 일곱 살의 내가.
어찌 되었든 병원이라니까, 나는 엄마가 걱정되어 늘 “엄마 많이 아파?”라며 물었다. 그러면 그녀는 흐리게 웃거나 울었다. 접수를 하고 잠시 기다리다가 그 이름이 호명되면,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는 말에 나는, 얌전히 놀이공간에서 다른 아이들(그 아이들은 아마 치료를 기다리는 아이들이었겠지)과 놀다가, 잔뜩 약을 처방받은(당시 정신병원엔 원내 조제 관습이 꽤 오래 남아있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엄마는 그 약을 먹고 항상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가끔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어린 마음에 덜컥 두려움이 몰려오면, 작고 통통한 손으로 검지만 펴서 엄마의 코끝에 갖다 대곤 했다. 미약한 숨결에 겨우 안도하던 나날들이었다. 이상했다. 병원이라는 건 대체로 가기 싫은 곳이지만, 그래도 다녀오면 아픈 게 금방 낫던데, 엄마는 너무 오래 아프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여덟 살에도 아홉 살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녀의 보호자로서 그곳에 동행했다.
자아라는 것이 생기고 내 삶은 벗어날 수 없는 어딘가에 처박혀 뒹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단단히 망가지고 잘못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늘 그 주변이 더 엉망인 것이라, 내가 힘들고 아픈 것은 티낼 수 없었다. 아마도 엄살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겠는가.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잖아. 저기 어느 나라는 당장 식수도 없어서 말라죽는다더라. 저기 어디는 친족 성폭행도 당했다던데, 적어도 나는 그럴 아빠는 없잖아.(지금은 이 생각이 그들에게 매우 실례이며 잘못된 생각임을 알고 있고, 사죄한다. 허나 그때의 나는 이런 못돼 쳐 먹은 생각을 시시때때로 할 정도로 제대로 된 인지능력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 고단한 마음은 내내 층층이 쌓이다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불현듯 충동처럼 쏟아지곤 했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건널목에 서서 달리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대로 발을 뻗어내면 귀를 찢던 클락션 소리에 주저앉는다던가. 인생 덧없다는 생각에 창문 밖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곳은 너무 낮다며 좀 더 높은 건물의 층수를 세 알려보는 일이라던가. 가스 불을 켜놓은 채 아무것도 올리지 않고 일렁이는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 같은 거. 아니면 스크린도어가 생기기 전 지하철 플랫폼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그 소리에 발끝 아래 검은 바닥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그런 일. 그것도 아니면, 늘상 집에 있는 엄마의 수면제를 왕창 입에 털어 넣어버리고 싶은 그런 충동.
참으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삶이었다. 그때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가끔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개를 돌리면 도로가에 내달리는 차들은 언제나 있고, 학교에도 집에도 어느 곳에도 창문은 있었다. 다만 좀 낮아서, 한 번에 죽지 않겠다 싶을 뿐이었지. 가스 불은 언제든 손 닿는 곳에 있었고, 지하철은 매일 왕복으로 타고 다니지 않았겠나.
이렇게 시시각각 몰려오는 충동에 대해 누구도 내가 아픈 것이라 알려주는 이가 없었으니, 나는 내가 유별나고 얼마쯤은 나약한, 유난을 떠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어느 나라는 식수도 없다는데, 고작 나 따위가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런 내게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준 건 의외로 첫 남자친구였다.
나는 열여덟 살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도 그곳에서 일했다. 나는 비록 실수투성이였지만 매니저 언니에게 예쁨 받는 아이였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담배를 피울 때 꼭 옥상에 따라 올라가 알랑방귀를 뀌며 살갑게 굴었다.
그날은 어쩐지 그 옥상의 높이가 조금은 높게 느껴졌었나, 하염없이 난간 아래를 바라보던 내 눈빛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갑자기 억센 힘으로 어깨를 잡아끌던 그의 눈빛이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기억만이 선명하다. 그날 그는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후에 2년여간 그를 만나고 헤어지던 날, 나는 참 이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길,
“헤어져도 괜찮으니 제발 살아만 줘, 부탁이야”
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아, 나는 살아야 하는구나. 여전히도 인생은 덧없고, 그 삶에 미련도 없었지만, 버려지는 와중에도 살아만 달라 애원하는 꼴이 퍽 불쌍해서, 나는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아마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려서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단단히 망가져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다. 어렴풋이 알고서는 그 인생을 조금도 닮고 싶지 않아 그랬다. 아집과 곤조였다. 딸은 박복한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 그 끔찍한 소리에 절대 부응해주고 싶지 않았다. 단 하나의 작은 습관이라도 어미의 것과 달리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밤이 나를 갉아먹어도, 나를 몇 번이고 주저앉혀 울려도 이 악물고 버텼다. 나는 달라. 나는 절대 당신처럼 무력하게 약에 의존해서 의지를 상실하지 않을 거야. 내 인생과 내 삶을 선택할 거야.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를 집필하면서 새로 알게 된 나의 기질은 나는 마음이 힘들면 하염없이 잠이 쏟아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평소엔 그 수면시간이 5시간이나 간신히 채울 성 싶은 주제에. 아마 더 이상 마음이 다치고 싶지 않아 생긴 방어기제일 것이라 추측한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이 잤다. 속독까진 아닐지라도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닐진대, 반나절이면 충분히 두 권을 다 읽고도 남을 줄 알았더니 자꾸만 잠이 드는 통에 다 읽어내기가 여간 힘들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깨면 악착같이 다시 다음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또 잠들었다. 그 고단함에 단 오 분, 십 분조차 평안할 수 없었다.
나는 꿈을 꿨다. 벽에 가만히 서서 옴짝달싹 움직이지 못했는데, 건너편에 있던 책장이 점점 다가왔다. 그 책장은 계속 다가오다가, 나를 압사시킬 것처럼 죄었다. 그 너머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꺼내달라 외쳤으나 그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파드득 경련하며 깨어났다.
늘상 있는 일이라 적응할 법도 하건만, 여전히 터질 듯 두 방망이질하는 심장이 곧 가슴을 열어젖히고 털럭이며 쏟아질 것만 같았다. 쇼크와도 같은 충격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깨어나 버린 의식과는 달리, 늘어진 몸뚱이는 아직 현실을 따라잡지 못해 무력한 눈꺼풀만 파르르 떨렸다. 숨소리가 고약해질 때면 그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채는 그가 다가와 목덜미를 주물러주는 것이라, 나는 문득 서러워서 무력한 마음을 고백했다.
“나, 이 책 읽는 거, 너무 힘들어…”
"그럼 읽지 마. 읽을 게 저렇게 많은데, 굳이 읽기 힘든 책을 읽어야 해?“
우습게도 그 말에 더욱더 오기가 생겨버린 것이다. 응. 읽어야만 해. 마치 사명처럼. 자기 학대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날은 마라톤을 대비해서 운동장에 나가 달리기로 했었다. 허나 무력해진 마음이 질척이며 발목을 붙잡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먹는 일도, 씻는 일도, 다 짜증이 났다. 약도 먹어야 하는데, 그저 졸리기만 했다. 그렇게 눈을 간신히 떠내 읽어 내려가다가, "엄마의 젊고 하얀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슬프고 아름다운 꿈이었다"라는 문장에 왈칵 터지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1권을 읽고 사람들의 리뷰를 미친 듯이 찾았다. 대부분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왜 방어기제를 꺼내 쓸 정도의 탈력감과 소모감을 느끼며 무력하게 스러지고 있는 걸까. 역시 나는 어딘가 문제가 있나 봐. 아니면 리뷰를 쓴 그 사람들이 사실은 ‘별것도 아닌 고작 그런 문제들’로 힘들다고 징징거렸던 거 아냐? 우와 나 지금 굉장히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정신병자 같았어. 부동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이런 생각이나 해대면 확실히 ‘정상’스럽진 않겠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진 말자.
2권은 1권보단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다. 물론 여전히 그녀의 관점과 생각은 나와 일정 부분 결이 비슷해선, 원한 적 없는 정신과 진료를 받는 기분에 발가벗겨진 수치심을 느껴야 했지만 그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오직 나의 개인적이고 슬픈 상처다. 그녀가 존재조차 모를 나를 찌르기 위해 쓴 글이 아닐 테니.
확실히 2권의 그녀는 1권의 그녀보단 조금 살아갈만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난 문장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그 문장을 오롯이 믿을 수 없었다. 기분부전장애를 아주 오랫동안 앓았던 그녀의 결말이 결국 사유를 밝히지 않는 뇌사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늘 솔직한 마음을 담아 쓰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단 하나 솔직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녀 또한 같은 고민을 했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아프고 힘든 마음이야 솔직하고, 날것으로 담을 수 있겠지. 다만 그렇게 긴 대장정을 함께 호흡해 온 독자 당신이, 그 길 끝에 여전히 만신창이인 나를 보고 싶진 않을 거라는 오만한 확신이 있다. 나의 글을 읽은 당신의 소중한 시간이 그저 감정 쓰레기통과 같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 건 나에게도 보람 없는 일이니까. 재미없고 고리타분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솔직하지 못했다고 배신감을 느꼈다면 할 말은 없지만, 다만 변명하자면 완전히 거짓만은 아닌 것이다. 종래에는 그렇게, 단단하고 완전하게 살아가고 있을 나를 희망하며 쓴 글일 테니까.
나는 그녀의 글 속에도 그런, 사랑하는 독자를 위한 선의의 거짓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만하다고 말하면 별수 없는 일이다.
2권을 덮으며 그녀는 ”나는 이제 내가 싫지 않다“고 말했다. 이 책으로써 그녀의 인생이 끝났다면, 그녀는 회복한 사람이겠지. 허나 그녀의 인생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늘 그렇듯 인간은 어느 기쁜 날도, 슬픈 날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녀 또한 마지막 장의 ‘내가 싫지 않던’ 어느 날 이후, 다시 ‘내가 몹시 싫어진’ 날을 맞이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던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있는, 애매한 사람’인 나는, 그녀가 종종은 예기치 못한 파도와 격랑에 휩쓸리고 무력하게 주저앉았으리라는 것을 안다. 내가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를 회복과 치유의 서사로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이토록 우중충하고 우울한 감정에 매몰되기 쉬운 인간인 것처럼, 그녀도 그랬겠지.
물론 나는 그녀의 글을 읽는 일이 참으로 힘들었지만, 읽는 사람이기 이전에 쓰는 사람으로서 내 글을 읽으며 누가 이렇게 힘들어한다면 그 마음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그래서 말하건대, 그녀의 글이 칼처럼 날카롭거나 송곳처럼 뾰족했던 것은 결단코 아니었음을 밝힌다. 그녀는 오랜 시간 고통을 버티며 그마저 삶을 사랑하려 애썼던 애잔하고 아름다운 인간이다. 다만 날카롭고 뾰족한 건 언제나 나의 마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와 참 많은 점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우리 둘 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 그녀에게는 세 강아지가 있고 나에게는 세 고양이가 있다. 그녀가 본인의 행동을 ‘유난’이라 지칭할 땐 발꿈치에 송곳이 박힌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유난 떨지 않고 ‘정상’처럼 살고자 함이 나의 방향성이었으므로. 인간은 다면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도.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도. 같은 시기에 따돌림당했던 것도.
그러나 내가 단 하나 절대 그녀와 닮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그녀의 다정이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또 그렇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로 그러지 못해 자책한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타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이 어딜 갔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기분은 어떤지 궁금해했다. 예쁜 옷을 입은 날엔 칭찬하고 싶고, 머리를 새로 하면 아는 척해주고 싶어 하는 다정한 인간인 그녀는 떠날 때마저 다섯의 생을 살리고 갔다 하니 나는 아마 평생에 걸쳐도 그녀의 다정을 발끝만큼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데에 꼬박 이틀이 걸렸다. 반나절이면 될 줄 알았건만, 하염없이 무력하여 무너져버린 시간이 그랬다. 첫날에는 무기력하여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으나, 둘째 날에는 간신히 조금 움직일 만큼의 기력이 생겨 무작정 움직였다. 약도 먹고 전날 못한 집안일도 몽땅 했다. 씻었고, 고양이들 화장실 청소도 해주었다. 계속 움직이다 보니 간만에 식욕이 돋았다. 밥을 먹고 운동장에 나갔다. 평소의 반 정도밖에 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맥박이 너무 튀어서 귀가 아픈 탓이었다. 모처럼 기운 차려보려는데 따라주지 않는 몸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운동장에는 늘 나보다 빨리, 오래 뛰는 사람들이 있다. 쏟아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들을 부럽게 쳐다본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들처럼은 뛸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 속상하다. 내일 병원에 가서 주치의 선생님께 마라톤일정과 맥박 약에 대해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금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선다.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켠다. 얼마쯤 삐뚤어진 마음으로 작성한 첫 문장이 ”나는 떡볶이가 싫다“라니 좀 우습다. 그런데 그 문장을 작성하는 손끝의 타건감이 꽤 쫀득하다. 어… 나 지금 조금 행복해졌나?
나는 필요한 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게다가 또 한 번 운이 좋게 삐뚤어지지 않고 사회화까지 마쳤다. 그랬더니 불행의 역치는 높고, 행복의 역치는 한없이 낮아진 인간이 되어버렸다. 물론 슬플 땐 한없이 허우적대겠으나 고작 키감이 잘 붙는다던가, 바람이 살풋 앞머리를 쓸어 넘겨준다던가, 그 하늘이 예쁘다면, 아니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하늘을 바라만 볼 수 있더라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2권의 책을 힘겹게 다 읽어내고, 처음으로 돌아가 그녀의 첫 문장과 다시 조우했다.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건 내가 자유로워지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 그 또한 그녀의 모습임을,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꼭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 문장에서 나는 비로소 허락받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죽고 싶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어딘가 아프거나, 망가진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건 어쩐지 멀쩡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일일 테니까. 그러나 가장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라는 그녀의 문장을 마주하며,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다만 늘 그렇듯 솔직해 마지않을 나의 문장에 또 얼마나 생채기를 입을지 조금은 두렵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가야 할 테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혹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네’라는 감상이 남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궁금증은 해결이 되었을까? 그녀가 살아생전 나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면, 운이 좋게도 내 글이 조금만 더 빨리 당신에게 닿을 수 있었다면,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있는, 애매한’ 내가 당신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었을까? 이 글을, 떠나간 그녀에 대해 쓴 글을 내가 감히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떠들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나는 다만, 여덟 번째 페이지 속 당신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싶었다. 이미 늦어버린 데다, 당신은 살아생전 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였겠지만, 무정한 신이라도 있다면 바라건대 그녀가 떠나는 그 길에 나의 마음이 한 줌의 온기가 되어 닿게 해 주기를. 젊고 아름다웠던, 용기 내어 끝내 그 삶을 사랑하고 싶어 했던 다정한 당신을 애도한다. 부디 그곳에서는 당신이 그 어떤 공허와 허무도 모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