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한때 죽고 싶었다. 죽고 싶기만 했을까, 죽기 위한 시도도 해봤지.
처절한 밤의 살고 싶다는 본능마저 닿지 않던 어느 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수면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댓 알. 이 정도로는 영 부족할 것 같아 충동적으로 집 안에 있던 약을 전부 끌어모았다. 언제 처방받았는지도 모를 감기약, 널리고 널린 진통제, 용도조차 알 수 없더라도 그저 알약이라면 무엇이든. 양손에 가득 차도록.
마지막으로 잠든 엄마를 시선에 오롯이 담다가 나는 무수한 그 약들을 삼켜냈다. 한 번으론 다 해낼 수 없어 두 번, 세 번, 다섯 번까지. 처절하게.
드라마에선 한 움큼 약을 삼키면 바로 정신을 잃던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상황이 이상해서 뭐가 잘못된 건가 고민할 즈음 감각들이 하나둘 비현실적으로 멀어져 갔다. 부드럽고 푹신한 무언가가 나를 감싸 안았고, 나는 둥실둥실 나른하게 떠 있었다. 어떤 이지를 가진 이후 처음으로 느껴본 ‘안전함’이었다. 시야가 흐려지던 그 순간에도 이게 천국이라면 진작에 시도해볼걸. 그렇게 생각했다. ㅡ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 중 ‘패륜의 역사’ 발췌
시도만 해 봤을까.
살해당할 뻔도 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두 번이나.
내가 조금만 더 착한 아이였다면, 당신의 고단함을 이해해줄 수 있었을까.
조금 이기적이었던 나는, 그 트라우마가 아직도 축축한 밤에 눌어붙는다.
내 엄마는 내가 첫 기억을 가진 순간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어느 날은 아파서. 또 어느 날은 그 아픔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그 삶을 포기하기 위해. 하굣길 집으로 향하는 길에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열이면 열, 나의 엄마에게 가는 구급차였다. 그러면 나는 낭떠러지 끝을 밟는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힘없이 늘어진 엄마의 손목. 복잡한 표정으로 핏덩이 같은 손녀를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시선. 그 모든 것들은 늘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죽음’에 꽤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다. 자의든, 타의든. 개입이든 관망이든. 그래서 나는 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어느 날은 내가 겪은 그 모든 일들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 혹은 그것들이 그저 재수 없던 어느 날의 사고였다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라서.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잘 버텨냈다고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그 모든 일들 끝에 지금 이렇게 살아있으니,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죽고 싶어서’는 아님을, 다시 한번 밝히기 위해 계획에도 없던 이 회차를 굳이 작성하고 있다는 걸 독자 여러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한다.
이전 편 댓글들을 보고, 메모장에 백업해둔 목차를 열어보니 아, 이거 마지막 회차 나오기 전까지 그 오해가 어쩌면 큰일 나겠구나 싶었다. 해서 부랴부랴 목차도 발행했다.
내 나이 서른하나. 그 모든 악몽 같은 속박에서 벗어난 지 이제 딱 십 년이 지났다. 시간이 정답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말을 아주 싫어한다. 하염없는 절망 속에 허우적대는 이에게는 단 하루의 시간도 억겁처럼 느껴지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어차피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그에게 조금만 다정하길 바란다. 그거면 된다.
요즘은 아이와 나의 바다라는 노래를 듣는다. 나는 여전히 그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가끔은 무너지고 가라앉지만, 이제는 꽤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가끔은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출근 도장을 찍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기운에 침잠한다. 그래도 이제는 그마저도 조금씩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중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어차피 병원이나 갈 거지만 괜히 예쁘게 입고 노트북을 챙겨 나오면 그 바람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다. 문득 건물 유리 벽에 비친 내 모습은 꽤 봐줄 만하다고 생각하고, 매번 똑같은 약을 처방해주는 약사님께는 고단한 마음을 숨기고 기분 좋게 감사 인사를 건넨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앞 카페로 들어가선 맛없는 아메리카노 대신 달콤한 주스를 주문하고, 모처럼 자리 난 창가에 앉아 하늘을 한 시간쯤 들여다본다. 문득 떠오르는 첫 문장을 아무렇게나 써 내리면, 새로 산 노트북의 타건감이 꽤 맘에 든다. 구름만 가득하던 하늘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린 푸른빛을 보면 기분이 금세 괜찮아진다.
좀 우습지만, 나는 내가 좋다. 물론 종이짝처럼 잘 구겨지고 찢어지는 내성은 조금 맘에 안 들지만, 고작 이따위 것들로 금세 행복해지는 내가. 그 고단한 시간을 버티고도 꽤나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이 어려운 이야기들을 솔직히 풀어내기로 결심한 내가.
여전히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다시 상처받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며 ‘망각’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던 기억이 해일처럼 덮칠 때면 손 쓸 도리가 없다. 이미 알고 있던 슬픔은 그 마음이 바래서 아픔도 덜하거늘, 갑작스레 덮쳐오는 기억엔 그저 무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쓴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역시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게 무섭다. 갑자기 어떤 기억을 마주하게 될지 몰라서. 그럼에도 쓰기로 했다. 그것만이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 믿고서.
하지만 나는 항상 나의 이야기를 읽는 당신들이 두렵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저를 치료받아야 할 아픈 사람으로 볼까 봐 그게 제일 걱정되고 무서워요…"
"음… 작가님의 글을 이제껏 봐온 사람들이라면, 얼마쯤은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낸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 지금은 행복을 알고 있는 사람.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걱정마세요."
우와. 내가 자주 쓰는 표현까지 부러 섞어가며, 이토록 다정하게 위로해주는 당신들이 있는 이곳에 내가 못 쓸 글이 있을까…?
나는 알고 있다. 죽음을 쓴다는 건 그것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뜻임을.
이 이야기는 대체로 나의 경험과 생각들로 이루어지겠지만, 이것을 읽는 당신 또한 언젠가 마주할 상실 앞에서 그 삶을 더 사랑하고 다정히 여겨주는 사람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