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떠나도 여전히 살아갈 이들에게.

by 마른틈

카카오톡의 대규모 업데이트 직후, 수많은 유저의 공분을 산 와중에 그 소란 속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언제부터 있던 기능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현대 문물에 조금 취약한 나는 이 추모 프로필이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인데, 낄낄대며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면 좋았으련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서글픈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그저 눈을 꾹 눌러 감아버렸다.


나의 죽음. 나의 마지막. 그것은 퍽 애잔한 일이라 생각한다. 흐려지는 시야는 침잠하다가 그 가장자리부터 잉크가 번지듯 검게 물들겠고, 물에 잔뜩 적신 솜처럼 무거운 몸뚱이는 그저 늘어지다 가라앉겠지. 불쾌하게 메마른 소음은 귓속을 맴돌다 느릿한 심장의 비어가는 소리를 끝으로 단전될 것이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무책임한 내가 얻게 될 안식과 평안, 자유만을 바랐을 뿐.


나의 사후. 내가 떠난 자리.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살아갈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처음 유서를 써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수련회를 떠났는데, 으레 그렇듯 잔뜩 체력을 뺀 첫째 날 밤, 캠프파이어에 둘러앉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유서를 썼다. 요즘 같으면 진작에 정서적 학대로 신고가 들어갔을지도 모 일이나 그때는 낭만의 시대였다.

벌써 십수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 내용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지만, 퍽 고단한 마음으로 살아가던 나는 그 유서를 쓰며 펑펑 울었던 것 같다. 물론 흑염룡이 날뛰고 감수성이 넘쳐흐르던 중학도 시절, 그리 우는 아이가 한둘은 아니었으니 특별히 눈에 띄는 꼴은 아니었을 테다. 다만 그 마음마저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겠지.

어렸던 나는 유서를 쓰며 어떤 해방감에 젖었다. 그간의 후회와 미련으로 쓰였을 친구들의 문장들 사이에서, 내 것은 어딘가 결이 달랐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실은 조금 버거운 마음. 그것이 본심임을 차마 숨길 수 없어 불안한 초조. 그럼에도 그 배반적인 마음만은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 이 모든 것을 이제 그만 끝내고 싶은 고단함. 그러나 이 무정한 세상에 차마 당신만을 두고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은 찐득찐득한 미련. 그 유서를 가슴에 꼭 안고 관속에 누워 뚜껑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이대로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고, 작은 아이는 간절히 소망했을지 모른다.

유서 쓰기와 관 체험이 끝난 후, 교관은 눈물 자국이 잔뜩 눌어붙은 아이들에게 그 유서를 캠프파이어에 태우라 말했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꼬깃꼬깃한 종이들을 미련 없이 던져 넣었다. 하나 같이 엄마 말을 듣지 않던 과거를 참회라도 한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틈 속에 나의 유서를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 숨겨 넣었다.


요즘 나의 삶은 꽤 평안하고 안온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생각한다. 만약 내가 어느 날 죽는다면 누가 슬퍼해 주려나. 나의 장례식에는 몇 명이나 올까. 언젠가 멀어지고 소원해졌던 당신들도 나를 찾아줄까.

사실 나는 사후세계는 딱히 믿지 않으니까, 이미 죽어 사라진 내가 그들을 볼 수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지켜줄 나의 사람들이 자못 허전한 내 인간관계에 서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실은 그 자리조차 무용하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어차피 나의 권한 밖의 일일 테니…. 내 소식을 영영 몰랐으면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또한 내 권한 밖의 일이겠지.


요즘 무엇이든 세 가지는 다 이루어준다는 ‘지니’가 그렇게 화제라던데, 이제는 그 생을 몹시 탐욕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는 세 가지의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돈“, ”더 많은 돈“, ”가장 많은 돈”을 빌 보려 한다.


허나 죽음을 앞두고 세 가지의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나의 지난한 생을 가장 아름답고 슬픈 문장으로 기록하여 단 한 권의 책으로 남길 수 있게 해 달라”고 빌겠다.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도 빌겠다.

마지막으로 “그리 존재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용기를 달라”고 빌겠다.

나는 여전히, 사라지고 싶은 생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과는 다소 결이 다른 마음이라, 어차피 살아가는 그 생에 꽤나 열정적으로 굴겠으나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저 그런 마음. 다만 기억조차 못 할 저자의 단 한 권의 기록쯤일 미련 정도.


추모 프로필 기간이 10년인 건 너무 긴 것 같으니 나는 그 프로필을 설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죽음에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은 슬퍼하다가, 가끔은 내가 했던 헛소리들을 기억하고 황당해하며 웃어주면 좋겠다. 서툴렀던 내 다정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이 글은 나의 두번째 유서다. 첫번째 유서를 몰래 주머니에 숨겨 가슴 속 깊이 묻은 이후, 수없이 죽음을 바라왔음에도 나는 단 한번도 유서를 쓰지 않았다. 어떠한 흔적으로도 남고 싶지 않았다. 죽음보단 삭제를 바랐던, 존재의 미련조차 없던 마음이었다.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이 유서를 쓰는 이유는 미련이겠다. 이 생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져버린, 우습고도 애잔한 아이러니겠다.

응, 사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싶다 건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에게 늘 다정하고 싶었던 나의 노력을 애틋하게 여겨주면 좋겠다. 문득 코 끝을 간질이는 바람에 멈춰 설 때면 나를 그리워해 주면 좋겠다. 나의 부끄러운 생각과 온 마음이 담긴 이 이야기들을, 가끔 읽으러 와주면 좋겠다.


나를, 잊지 않아 주면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