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은 언제나 어려워
‘옛날 그 게임’의 감수성을 재현해 새로 오픈한 클래식 게임. 그 게임은 오픈하자마자 수차례 서버가 터져나갈 만큼 동시접속자가 몰렸다. 아무래도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마음은 세대를 달리해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그 향수는 여전한 듯하다.
게다가 다 같이 처음 시작하는 오픈 초기 아니겠는가. 성장격차는 크지 않고 그 속도 또한 비슷한 것이니 내가 슬라임을 잡을 때는 이놈도 슬라임을 잡는 것이고, 내가 오크를 사냥할 땐 저놈도 오크를 잡는다. 그렇게 수천, 수만 명이 몰려드는 서버에는 모험가님께 기꺼이 희생당하고 전리품을 내놓아야 할 몬스터들의 목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자리요”
그리하여 그 게임의 어떠한 지분도 없을 주제에 운 좋게 새로 열린 채널의 자리를 선점한 이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자리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고, 그것을 쓸 만큼 쓰다가 일정 수준의 재화를 받고 ‘판매’하기까지 한다. 차라리 그 게임사의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라면 합당한 경제활동이라 여기겠건만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조각에, 하물며 그 어떤 권리조차 없는 자들이 행사하는 ‘소유권’이라니. 참으로 무용하고 황당한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마른틈씨는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여겼다. 성악설보단 성선설을 믿는 그녀는 언제나 이유 없는 악의는 없다고 여겼다. 늘 ‘양심에 손을 얹고’ 떳떳한 행동만 하고 싶었다. 물론 가끔은 그 마음이 울컥하여 일탈을 꿈꾸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만 그치는 일이었다. 해서 정도를 넘지 않는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그러니 비합리적인 그 작태들을 보며 그저 “자리를 돈이라도 주고 샀나 보지?”라며 투덜거릴 뿐이지 않겠나.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순순히 수많은 채널을 방황하는 그녀는 결국엔 쫄보였던 셈이다.
수많은 채널과 사냥터를 떠돌다가 원래라면 용사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하여야 할 현장이 지나치게 평화로운 것을 목격하였으니, 다급한 마음에 스킬부터 날리고 본 것이다. 그녀는 문득 줄에 매달려 있는 어느 캐릭터를 발견했으나 그저 *잠수 중인 유저의 자리를 운이 좋게 넘겨받았다고 여겼다.
맵을 돌며 두 사이클쯤 사냥했을까. 줄에 매달려 있던 그 캐릭터가 내려오더니 말하는 것이다.
“제 자린데요”
마른틈씨의 얼굴에는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사냥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경험치 버프 물약을 챙겨 먹은 상태였다. 물론 단순히 그 버프가 아까운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을 떠나 또다시 빈자리를 찾아 기약 없는 시간을 방황해야 할 그 고단함이 그녀를 망설이게 하고 있던 찰나였다.
“내 자리라고 새끼야, 가정교육 못 배워 처먹어서 대가리에 든 게 없냐?”
오. 그가 화났다.
마른틈씨는 망설이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대체로 대가리가 꽃밭처럼 구는 그녀겠으나, 딱 하나 고집스럽게 버티는 성질이 있다면 그건 바로 ‘청개구리’ 기질인 것이다. 하라는 건 절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건 곧 죽어도 해야 하는 그것 말이다. 물론 못 말리는 그 곤조는 살아가며 적당히 사회화를 거쳐 누그러졌으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패악을 부리는 상대에게 굳이 차려줄 예의란 없을 터였다.
또한 마른틈씨는 근성이 좋았다. 이전부터 한자리에 앉아서 하는 행위라면 누구에게도 뒤져본 기억이 없다. 때와 관심사에 따라 그 종류만이 달라졌을 뿐, 그녀는 늘 한자리에서 목표치까지 모든 것을 해치웠다. 그것이 공부든, 일이든, 혹은 게임이든 간에 필요하다면 연일로 밤을 꼴딱 새워도 개의치 않았다.
문득 스쳐 가는 기억에 함께 게임을 하다가 화가 나면 지옥 끝까지 상대방을 찾아다니며 괴롭히던 지인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똥 밟았다 치고 잊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시간 낭비, 감정 낭비를 하느냐”라고 물었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시간 낭비하지 않아. 시간 빌 게이츠는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공교롭게도 그때의 마른틈씨 또한 아주 여유로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간 친구의 명언을 가슴에 새긴 그녀는 패악을 떠는 그 녀석에게 '시간 빌 게이츠'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사냥을 이어가자, 상대는 내내 상스러운 욕을 섞어 자리 주장을 이어갔다. 허나 그것이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채팅 대신 스킬로 마른틈씨가 잡으려던 몬스터만을 겨냥해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른틈씨는 다수 전투에서 유리한 직업군은 아니었기에, 객관적으로 보면 상대에게 밀리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허나 오픈 초기 빠르게 성장을 이어가야 하는 게임에서 마른틈씨가 그에게 거슬리고 짜증 나는 존재였음은 분명했다. 얼마쯤 성깔을 부리고 방해하면 떠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저 새끼는 밥도 안 처먹나.’ 곧 죽어도 포기를 안 하고 버티는 것이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도 곧 초조해지고 마는 것이다.
“어휴, 많이 처먹고 가라”
그리하여 백기를 든 상대가 떠나자, 마른틈씨는 그 자리에서 밤새 사냥을 이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녀석의 닉네임을 공식 홈페이지에서 검색해 보건대,
[순위 랭킹]
마른틈 Lv.228
.
.
.
그 녀석 Lv.192
하하, 쪼랩이 까불고 있어.
마른틈씨는 처음부터 그 사냥터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조금 피곤하긴 했으나 ‘시간 빌 게이츠’였던 그녀는 자리는 다시 찾으면 될 일이라며 마찰 없이 ‘좋은 게 좋은’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데없는 비난과 조롱이 쏟아지는 순간, 그녀는 그 공간을 단순히 사냥터로 여긴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할 내 공간, 즉 ‘심리적 테리토리’로 인식했을 것이다. 심리적 테리토리란 사람이 공을 들여 점유하거나, 오래 머문 장소에 대한 심리적 소유감과 애착을 일컫는다.
게다가 ‘반발심리’, 일명 청개구리 기질까지 더해졌다. 시키는 것은 하기 싫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은 마음. 이는 자기 결정권이 침해당할 때 생기는 저항 반응이다. 아마 한 번쯤 다들 겪어봤을 것이다. ‘아, 이제 공부해야지’ 하는 순간, “너 공부 안 하니?”라는 말에 급격히 무기력해지는 마음을 말이다.
그리하여 상대가 무례하게 몰아붙이며 소유권을 주장할 때 마른틈씨는 그 싸움을 단순히 자리를 지키는 것 이상의 자신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싸움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날 밤, 마른틈씨는 미련하리만큼 그 자리를 지켜냈다. 게임 속 사냥터야 지나가면 잊힐 일이고 익명성에 숨어 뱉은 무례쯤은 눈감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방적인 무례에 익숙해지고, 눈감아주다 보니 어느 순간 늘 ‘비켜주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겠나.
어쩌면 마른틈씨는 현실에서 늘 얼마쯤 감수해 오던 그 무례를, 작고 복잡한 그 세계에서만큼은 더 참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가 지켜낸 것은 단순히 자리나 전리품이 아닌, 자신을 최소한으로 지켜내고 증명하려는 자존감의 파편인 것이다.
[자리매매증서 #030429-MAPLE-TOOL]
✓ 본 문서는 다음 내용을 증명합니다:
- 자리명: 오크숲 7채널 북동쪽
- 현재 점유자: 마른틈
- 점유 시작 시각: 오후 5시 31분
✓ 거래 내역
- 다음 희망자에게 해당 자리를 "권리금" 50,000 Gold에 양도할 수 있음
✓ 주의사항
- 게임사는 이 증서에 대해 책임지지 않음
*잠수: 캐릭터는 켜 둔 채 아무런 조작을 하지 않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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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해부 대상이 되니 영 민망하군요
마른틈씨는 사실 곤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