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향이 은은히 퍼지는 봄날, 들녘은 완연한 봄빛으로 물들어간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꽃이 있다. 연한 자줏빛 줄기 위에 수줍게 피어나는 보랏빛 꽃. 그 꽃이 그리운 계절이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름, 밀림 같은 숲, 은빛 지느러미처럼 흔들리는 억새들녘에서도 종종 특별한 식물들을 만난다. 혼자 힘으론 살아갈 수 없어, 다른 식물의 양분에 기대어 생을 이어가는 기생식물들.
그중에는 광합성을 하며 기생하는 식물도 있지만, 초종용과 백양더부살이처럼 광합성조차 하지 못하는 식물들도 있다. 두 식물은 열당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초종용은 사철쑥이 자라는 바닷가 인근이나 오름 근처에서 자주 보인다. 사철쑥의 뿌리에서 양분을 빨아들여 살아가기에 ‘사철쑥더부살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양더부살이는 1928년, 백양사 인근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이름을 얻었다. 희귀 식물로 분류되며, 현재는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 꽃은 볕이 잘 드는 들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아무 곳에서나 피지는 않는다. 반드시 쑥이 함께 있어야 하고, 충분한 햇볕과 적절한 바람이 머무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피어난다. 쑥의 뿌리에 반기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두 식물은 외관도 비슷하다. 키는 10~30cm 정도, 연한 갈색빛줄기엔 비늘처럼 생긴 삼각형 잎이 어긋나게 달리고, 그 위엔 잔털이 빽빽하다. 줄기 따라 보랏빛 통꽃이 핀다.
초종용은 꽃잎 안에 흰 줄무늬가 없지만, 백양더부살이는 꽃잎 안에 섬세한 흰 줄무늬가 스며 있다. 마치 흰쌀알을 살포시 물고 있는 듯하다.
땅 위에서 보면 마치 스스로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 뿌리는 조용히 다른 식물에 닿아 있다. 그 양분을 내어주는 식물들이, 문득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세상에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이 있다. 다른 식물의 뿌리나 줄기에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 어쩌면 얌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양분을 내어주는 사철쑥 등은 다른 생명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자신의 몸을 조용히 내어준다. 말없이 그렇게 살아간다.
그 고마운 식물들이 있기에, 우리는 또 다른 식물을 만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주는 모습. 그 따뜻한 연결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지팡이가 되어준 적이 있었을까? 걸을 수 없는 이에게 발이 되어준 적이 있었을까? 솔직히, 그 한 가지도 해본 적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그 식물들보다도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몸을 소중히 여기다, 언젠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는 날, 내 장기를 기증하려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에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다. 꺼져가는 생명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 가슴속에서 내 심장이 다시 뛴다면, 그 울림은 이 세상의 맥박이자, 나의 맥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