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이름

Ann Roth-누가 감히 존버를 말하는가

by 쓰리씀

감탄한 그녀-Ann Roth

나는 영화 크레딧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냥 예의상 읽는 게 아니라

주연 배우의 친인척은 없는지, 감독의 친인척은 없는지 샅샅이 뒤진다.

그러면 놀라우리만치, 아니 사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많은 혈연관계를 발견하곤 한다.

할리우드도 역시 별수 없구나,

소일거리라도 손에 쥐어줘야 하는 집안에 속 썩이는 막내아들쯤 하나씩 있겠지,

근사한 명함 하나 달라고 조르는 트로피 와이프도 있겠지,

엄마가 공부하라고 할 때 팽팽 놀던 여동생 용돈이라도 챙겨줘야 했겠지,

별별 가계도를 상상해 본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예전 영화의 크레딧에서 본 이름을 또 만나게 되는 반가운 경우가 많다.

이 거대한 영화산업이 실제로는 소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내 취향이 만들어 낸 착시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내가 좋아한 영화의 크레딧을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더 유심히 보게 되니 말이다.
Ann Roth라는 이름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내 인생에 등장한 그 첫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감탄한 장면

앤 로스가 가장 처음 각인된 영화는 “The Love Affair”였다. 리메이크 영화임에도, 엔리오 모리꼬네의 섬세한 음악과 아름다운 영상미, 그리고 말년의 캐서린 햅번의 연기까지 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었다.

약혼녀가 있는 남주 워렌 베티가 여행 중 우연히, 약혼자가 있는 여주 아네트 베닝과의 강렬하지만 짧았던 첫 만남 후

어쩌면 환상이었을지 모른다고, 기억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을 거라고 숙취를 다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던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그녀는 어제 밤보다 더 눈부시고 우아한 모습으로 그 앞에 다시 나타난다.

숏컷으로 두드러진 아름다운 목선과 기품 있는 곧은 자세,

시크한 크림색 홀터넥 점프슈트를 입고 무심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씬에 뺨을 열 번을 때리고도 남을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영화 속에서 아네트 베닝은 사회적인 지위나 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지적이고 단정하며, 계산 적이지 않고,

고고하면서도 생기 있는 캐릭터였는데,

심플하지만 세련되고 맵시 있는 옷차림이 바로 그 분위기를 완성시켰다.

러브 어페어 외에도 1990년대~2000년대의 수많은 영화에서 그녀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또 다른 휴가룩의 정석 The Talented Mr. Ripley, The English Patient,

깔끔하고 실용적이지만 언제나 우아함과 시크함이 한 스푼 더해진 오피스룩의 정석 Someone like you,

그리고 수많은 메릴 스트립의 영화들까지.

혹시? 싶어서 찾아보면 반드시 앤 로스였다.


감탄한 이야기

그리고 한참 후, 2009년.

맛없없의 조합 노라 에프런과 메릴 스트립의 영화 “Julie and Julia”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았을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년이 넘게 이런 센스를 유지한다고?

90년대를 그녀의 커리어의 정점이라고 본다 해도

마흔 살에 입신양명했다고 후하게 쳐줘도,

60대까지 이렇게 왕성한 현역이라고?

그녀의 커리어에 호기심이 생겨 족적을 되짚어 보니,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2009년에 이미 78세였다.

그것도 무슨 스튜디오나 아뜰리에 같은 이름이 아니라

앤 로스라는 이름 하나로 당당하게 크레딧에 올랐다.

분명 도움을 주고받는 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이름으로 모든 결과물에 대한 감각과 책임을 여전히 스스로 주도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이제는 놀라도 된다.

재작년, 2023.

그레타 거윅의 영화 Barbie의 의상 담당이 누구였게?

바로 92세의 앤 로스. 반전 없는 반전이다.

여고괴담 급 사라지지 않는 이름.

이 글을 쓰면서 계산기를 몇 번이나 두드렸는지 모르겠다.

암산으로는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는 커리어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게 2009년 12월이었으므로

곧 만 16년이 되어가고,

앤 로스는 만 61년이 되어간다.

다행인 건, 그녀의 커리어의 정점이었던 90년대가 60대였다는 점이다.

그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앞으로 50년은 더 남았다는 게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패션으로 세계를 정복한 JW 앤더슨이 사실은 나보다 한 살 동생이고,

세계를 정복할 준비가 되어있는 떠오르는 신예들은 나보다 한참 동생인지 오래다.

미디엄의 재능에, 미디엄의 노력으로

이제 고작 16년을 채워놓고,

“감” 떨어졌다고,

젊은 애들과는 경쟁이 안된다고

이 바닥에 더 이상의 비전은 없다고

이제 뭐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다른 길을 기웃거리던 근 몇 년이 초라해진다.

세계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30년은 해봐야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고

60년은 해봐야 “앤 로스”라는 상징으로 영화에 등판까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앤 로스는 영화 <바비>의 마지막 장면에 실제로 등장한다. 젊고 완벽한 바비가 노년의 여성에게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내가 나라고 굳이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15년 후에, 이제야 좀 알 것 같다고, 다시 이 글을 이어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또 모르지,

2070년에 누군가가 크레딧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소름 돋아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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