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이라는 오해

낸시 마이어스와 노라 에프런의 부엌

by 쓰리씀

우리 집에는 내 방이 없다.
대신 부엌이 마치 내 방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게 무슨 다듬이 방망이로 주름 펴던 시절의
케케묵은 젠더 규범인가 자책할 때도 있지만,

평소엔 토스트의 딸기잼 바른 부분이 바닥에 떨어져도

다시 집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청결이 추구미이면서도,

정작은 틈만 나면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애증의 공간이다.

다른 어느 방보다 부엌이 더러운 건 특히 참지 못하니, 이미 나와 동일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으로

내 부엌에서는 탈출하고 싶어도

남의 부엌 들여다보는 건 여간해서는 질리지가 않아

부엌 영화 컬렉션이 따로 있을 정도다.(바베트의 만찬, 웨이트리스, 초콜렛, 토스트, 밀드레드 피어스…)


감탄한 그녀

로코의 명장 낸시 마이어스(Nancy Meyers)를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하다 보면

NancyMeyersKitchen 계정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부엌을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내 타입이 결코 아닌 사람에게 우연한 기회 혹은 사고로 호감을 느끼고 한창 애정을 키워가던 중

장애물이 발생해서 잠시 멀어졌다가

이대로 놓칠 수 없다, 이내 용기를 내서 다시 사랑을 쟁취하는 로코의 3단 권법은

말 그대로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낸시 마이어스의 영화는

‘부엌’이라는 공간에 담아내는 감독의 애정과 정성 때문에 보지 않을 수가 없는 비디오다.


낸시 마이어스의 부엌들은 내가 지향하는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카운터 위에는 항상 빵과 과일들이 구비되어 있고,

캐비닛에는 언제든지 손님이 와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대량의 식기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웃음소리와 대화가 가득한,

다정함과 온기가 넘쳐흐르는 풍요로운 공간.
영화 <It’s Complicated> 속 주인공 제인의 부엌이 대표적이다.

현관문을 열면 곧장 식당이 보이고,
좌측에는 부엌, 우측에는 거실이 자리한다.
식당 한가운데에는 낡은 헛간(rustic barn style)을 연상시키는 큼지막한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다.
부엌에는 파티시에인 주인공 제인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늘 빵과 파이를 준비해 두는 대리석 아일랜드 테이블이 식당 쪽을 향해 있고,

거실에는 엉덩이를 푹 파묻을 수 있을 듯한 포근한 패브릭 소파가 놓여 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집에서 만든 향긋한 유기농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일상이란.

마치 우리 둘째가 우리 집은 왜 엘사의 얼음성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건 손으로 그린 거라 그림으로만 있는 거야.

라고 대답했을 때와 같다.

빵은 하루만 지나도 딱딱해지고,

과일은 반나절만 올려놓아도 금세 날파리가 꼬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낸시 마이어스의 영화를 보며
부엌이 살림이 치이는 노동의 공간이기보다,
레몬 제스트처럼 작은 차이로 삶의 맛을 확 바꿔놓는 낭만을 꿈꾸게 된다.


감탄한 이야기

낸시 마이어스가 감탄할 만한 낭만적인 여성상을 그려냈다면,
노라 에프런(Nora Ephron)은 부엌에서 써 내려간 여성들의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명작-<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에서의 멕 라이언은 부엌이 어디에 있는지, 가스불은 어떻게 켜는지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이미지였다.

사실은 노라 에프런 그녀 자체가 그렇다. 유명 희극작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가정부가 상주하는 비버리힐스 저택에서 자라며 저녁마다 코스 요리를 먹었다고 하니. 제목에 붙인, 칼질하는 노라의 사진만 봐도 그렇다. 무 하나 썰면서 저렇게 어색하게 어깨를 추켜올린 모습이란!

그래서 그녀의 유작이 된 <줄리&줄리아>에서는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부엌 스토리를 보여주었지만,

부엌이 달콤한 환상의 공간은 아니었다.

현대의 줄리는 자기 회의감에 빠졌을 때 매일 줄리아(차일드)의 레시피를 요리하고 그 기록을 블로그에 올리며 자신과 삶을 다시 추슬렀고,
50년 전 배경의 줄리아(차일드)는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무료하던 시간을 요리로 채우며 몰랐던 적성을 발견하고, 보람과 활기를 되찾았다.

이들의 무대는 언제나 부엌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거대한 서사를 펼치려는 야심의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It’s Complicated> 속 제인의 널찍하고 풍요로운 부엌과 달리, 더 소박하고 아담한 부엌이었다.

노라 에프런이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 <줄리&줄리아>는 ‘신데렐라 스토리’였다. 두 여성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변화에는 왕자의 구애도, 한순간의 기적도 없었다. 오직 매일의 레시피, 그 단순한 실천의 반복이 작은 성취를 쌓아 올렸고, 그 작은 역사들이 모여 불확실한 삶 속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나는 아마도 부엌에서 거창한 무언가를 바랐나 보다.

일하는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어 부엌살림을 하찮은 일처럼 소홀히 했다.

하지만 정작은,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에 맺힌 물방울까지 말끔히 닦아내는 순간,

햇빛에 바싹 말라 빳빳해진 수건의 깨끗한 향기,

물청소 후 맨발로 바닥을 밟을 때 느껴지는 보송보송한 감촉,

끓이던 국이 간이 안 맞아도 참치액젓을 살짝 넣으면 엄마가 끓여주던 맛이 나는 순간.

그 자잘한 완성들이 나와 가족들의 불안정한 일상을 조금은 다독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해야 할 살림살이를 맞닥뜨리면 자주 떠올리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있다.

<오늘 하루 내 살림살이>라는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언제 해도 내가 할 일이므로 그때그때 눈에 띌 때마다 즉시 해치워야 한다. 그때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어 내가 그곳에 그렇게 존재한다.


그 작은 마음가짐 하나가

끝없는 살림의 노동을 리추얼로 바꾸고,

내 삶을 다시 가다듬는 힘이 되어 준다.

작고 소중한 성취들이 모여

결국 나와 가족을 지탱하는 서사가 된다.


그래서 오늘도 또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

해야겠다고 최면을 걸어본다.


함께 쓰는 감탄노트

내가 감탄하는 작은 성취들은 늘 곁에 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스쳐 갔지만,

마음을 멈추어 바라본 적은 드물다.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사소한 기쁨을

애써서라도 발견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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