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를 끊어내고 다시 쓰는 용기

수잔 베에르(Susanne Bier),<In a better world>

by 쓰리씀

감탄한 그녀

나와의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덴마크 영화감독 수잔 비에르는

남자 취향만큼은 정확히 일치한다.

After the Wedding의 매즈 미켈슨,

In a Better World의 미카엘 페르스브란트.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 속에서 반짝이는 깊은 눈빛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두 편의 영화 덕분에

내 취향이 북유럽의 사연 많은 중년 아저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에 먼저 끌렸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수잔 비에르 영화의 진짜 매력은 따로 있다.

전혀 검증되지 않고, 미루어 짐작하는 바,

그녀가 유대인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부모 세대의 그림자 속에서 자랐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영화 속에

단순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넘어,

흐름을 끊어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스며 있다는 점이다.


나의 개인적인 상처 역시,

그것이 역사가 되지 않도록 반드시 다른 선택을 하겠다는 결심.

그 결심이야말로 그녀의 영화가 남기는 가장 강렬한 감탄이다.


감탄한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수잔 비에르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윤리적 선택을 마주할 때,
자신의 약점이나 과거의 실수를 “덮어두는” 대신 반드시 마주한다.
그리고 결국 결정을 내려, 새로운 관계와 역사를 다시 써 내려한다.
연약한 인간임에도 놀라운 용기를 가진

일상의 인물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After the Wedding과 In a Better World는
내 삶의 주체로서,

나 역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내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큰 울림을 주었다.


After the Wedding에서 주인공 요르겐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병을 숨기고 홀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재 부인의 전 남편이자 자신이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딸의 친부인 자콥에게 위장 접근한다.
딸의 존재조차 몰랐던 자콥은 20여 년 간 먼 타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요르겐이 죽은 뒤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해 달라는 요구였다.

요르겐의 계획을 단순한 책임감이나 계산값이라고 여긴다면 지나치게 냉정하고 잔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요르겐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보다 더 큰 믿음을 느꼈다.

남편으로서 자신의 빈자리뿐 아니라 아이들의 아버지 자리까지 대신해 주기를 바란 건,

아내가 선택하고 사랑했던 남편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였고, 그 믿음은 아내로부터 시작되어, 그 둘 모두에게 동시에 건네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내에 대한 소유욕과 전 남편에 대한 질투의 고리를 완전히 끊었다.

전적으로 사랑하고 믿기로,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림으로써

가족들에게 자신이 없는 삶 이후의 역사까지도 바꾸어 주었다.

나의 부재 이후의 삶까지 통제하고 싶어 하는 극 J형 인간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마주한 연약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고 담대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감탄한 장면

In a Better World에도 역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사연 많은 북유럽 아저씨가 등장한다.

미카엘 페르스브란트는 두 아들의 아버지로,

아내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해외 의료봉사로 집을 자주 비우며

물리적으로도 가족 곁을 지키지 못하는 인물이다.

은따를 당하는 첫째의 학교생활 문제로 이미 마음이 무거운 와중에,

어린 둘째가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와 몸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마주한다.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상대 아이의 아버지가 갑자기 격앙되더니
미카엘의 뺨을 수차례 내리친다.
아이들 앞에서 구타를 당하는 굴욕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끝내 단 한 번도 반격하지 않는다.

반격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폭력은 내 쪽에서 멈출 때에만 끊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뒤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호수에 몸을 던진다.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폭력의 열기를 홀로 가라앉히는 모습은,
그의 호수같이 파랗고 깊은 눈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도 한동안 받아봤던 심리상담은 언제나, 항상

유년시절부터 시작된다.

부모님과의 관계,

엄마와의 상호작용.

심지어 오은영박사님의 하나뿐인 아들도

엄마와의 상처가 없을 리 만무한데

나 역시 예외일 순 없지 않겠는가.

특히 아이들에게 화가 날 때,

더구나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어린 시절 엄마에게 들었던 가시 같은 말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 순간, 종종 인어베러월드의 주인공이 호수에 몸을 던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숨 고르고, 오히려 침묵하려는 노력으로

그 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보려고 한다.


이미, 가족밖에 모르는 착한 남자와 결혼한 나는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상처를 끊어내고 싶은 나의 소망을 90% 이상 이룬 것과 진배없지만

동시에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지라는 결심은

엄마를 향한 너무 큰 배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넘어서는

간절함이기도 하다.

내가 기꺼이 피할 수 있는 조건과

나만이 내릴 수 있는 선택으로

물려받은 역사를 끊고,

우리만의 인생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싶다는 소망.


차가운 호수 속에서

얼얼한 뺨을 만지듯이

나는, 언제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할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어제까지도.


함께 쓰는 감탄노트

어떤 말은, 어떤 사건은 나를 덮치고 쓸어버린다.

그 때의 나는 어떻게 그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까?

그 때의 나를 위로하고 다독이고 싶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킬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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