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라 커스버트, <빨강머리 앤>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의 구조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가운데 방’이라고 부르던 작은 공간에 TV가 있었다. 거실과 부엌 사이, 커튼으로 구분해 둔 그 방은 요즘 유행하는 알파룸 같은 구조였건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나는 그곳에 들어가 만화를 보는 게 하루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중에서도 <빨강머리 앤>은 내 유년기를 넘어 지금까지도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좋아했던 에피소드는 앤이 다이애나를 초대해 티타임을 가지는 이야기다.
포도주를 포도주스로 착각해 취해버린 다이애나 때문에 두 소녀는 억지 절교를 당한다. 어린 나는 앤과 똑같이 절망하고 속상했는데, 그때 마릴라가 이렇게 말했다.
“진짜 포도주스였어도, 큰 컵으로 몇 잔을 연거푸 마시면 탈이 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 장면이 내가 기억하는 마릴라였다.
겉바속촉. 옷도 탄 식빵 같은 진한 갈색옷만 입고, 한 번 크게 웃을 줄도 모르지만, 자책하는 앤을 달래주고 싶어 하는 따뜻한 어른이었다.
2017년, 첫 딸을 키우며 <빨강머리 앤>을 함께 정주행 했다.
어차피 미디어에 노출되었다면, 양질(?)의 콘텐츠를 보여주겠다며,
그때는 지금처럼 구독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었을 때라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USB에 직접 내려받아 TV와 연결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30년 만에 다시 만난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이 아니라
깊이 파인 팔자 주름에, 언제나 깨끗하고 반듯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마릴라 커스버트가 주인공이었다.
감탄한 그녀
어릴 적 TV 만화로 본 마릴라 커스버트는
평생을 미혼으로, 오빠와 단둘이 살면서도 단정하고 검소하게 살림을 꾸려온
무뚝뚝하고, 약간은 무섭기도 한 중년 부인이었다.
다시 발견한 마릴라는
어느새 중년 부인이 된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날 법하지 않은 데다
처음 여자아이를 키워보느라 우왕좌왕하는 육아 초보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전형적인 “신경질적인 여자”였다.
늘 절제되고 단정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여자.
빈말은 하지 않는 효율성.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총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달음에 마차를 빌려 타고 시내까지 달려가
밤을 지새우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덕후력까지!
내가 사랑하는 여성상의 총집합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처럼 편두통도 있었다!!!
감탄한 장면
편두통연맹 대변인으로서,
우리 편두통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질이 예민하다. 한 마디로 까탈스럽고 성가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여유롭고 느긋한데 편두통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쓰거나, 속 끓이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증상이 나타난다.
앤이 초록색 지붕 집으로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마릴라의 브로치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릴라는 앤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고 속이 들끓는다.
하지만 앤에게 꼬치꼬치 캐묻거나 사실을 말하라고 들들 볶는 대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집안 대청소를 시작한다.
원작인 몽고메리의 책에서도
초록색 지붕 집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집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마릴라는, 깨끗해서 청소가 필요 없는 집을 맹렬하게 쓸고 닦는다.
의자까지 모두 위로 올려놓고 바닥 물청소를 하고,
선반 위의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걸레질을 하고,
난간에, 기둥까지 박박 문질러대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혼란을 닦아내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감탄한 이야기
에이미 탄의 <부엌신의 아내>에서도 주인공이 청소를 하다가 카펫의 얼룩을 보고,
내 인생의 얼룩처럼 지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나를 불행하게 했던 전 남편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렇다면 바닥을 닦으면 되지, 마음에서 그를 몰아내면서 말이야"라고 하며, 곧장 진공청소기를 꺼내기도 한다.
청소는 당연히 엄마 몫이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내가 그 ‘엄마’가 되어
언제 하느냐가 문제지 어쨌든 할 사람이 나 밖에 없어지는 상황이 되고서부터는
늘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와 부담처럼 느껴져
이 노동에 어떻게 임해야 할지에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결과,
고통스럽게 해치우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하게 수행하는 여성들을 본받고 싶었다.
도미니크 로로는 <심플하게 산다>에서
청소라는 물리적인 노동의 세계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 세계에는 아름다운과 올바름의 가치가 있다.
라고 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체득한 듯 보였다.
나도 청소를 할 때, “밖”이 아니라 “안”을 청소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려고 한다.
물건을 버릴 때도 마음의 복잡함을 덜어낸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비운다.
마음이 복잡할 때 공간을 정리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내가 하는 행동과 믿음의 뿌리는,
결국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의 누적이니까.
내가 가구 위치를 바꾸거나
팬트리를 뒤집는 날은
남편이 다가와 슬쩍 물어본다.
“무슨 일 있었어?”
주변에 질서를 부여하면 마음에도 질서가 자리 잡는다고 했다.
질서를 부여할 필요도 없게 간소하게 살고 싶은데
첫째 때, 한 2년만 쌈박하게 쓰고 치우자고 들여놓은 미끄럼틀이
셋째까지 대물림하여 7년째 거실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어쩔 수 없다면
마음의 질서라도 화이팅.
함께 쓰는 감탄노트
마음의 복잡함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먼지를 털어내듯, 상자를 비워내듯, 작은 제스처 하나로 정리가 되곤 한다.
매일, 쓰지 않는 물건을 버려도
또 매일 버릴 것이 나온다.
남편이나 아이들의 물건은 쉽게 버려지는데,
내 물건을 버릴 때는 유난히 오래 망설인다.
그래서 오늘은 내 물건만 골라 버리고
일기에 남겨봐야겠다.
당신이 오늘 버리고 싶은 건
물건인지, 마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