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이 아니라, 이해를 위하여
운영하던 유치원에
조부모가 키우는 아이가 있었다.
부모는 집을 나간 지 오래였고,
그 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그 당시 유아교육비는
부모의 소득 기준에 따라 국가에서 차등 지원되었다.
그런데 아이는 서류상 부모가 있었고,
그 사실 하나로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교육비는 계속 밀렸고,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솔직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이해는 했지만,
나도 결국 사람이기에,
교육비가 제때 들어오지 않을 때면
속상함과 답답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조금 달랐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
빠진 준비물,
늘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 등원하던 모습.
그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는 종종 손수 뜬 목도리를 건네셨고,
김치 한 포기, 고추 장아찌 한 봉지,
오이지 두 쪽을 담은 반찬통을 내밀며
작게 말씀하셨다.
“미안해서요…”
내가 특별히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 정성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아이에게 셔츠 한 벌, 바지 하나를
조심스레 건넸다.
그러자
며칠 뒤,
할머니는 또 장아찌를 들고 오셨다.
참, 부담스러웠다.
교육비는 여전히 밀렸지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이 아이는 장학생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자
조금은 편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이는 무사히 졸업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시간은 흘렀고,
그 아이도, 그날들도 조용히 잊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침개 한 접시,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할머니가 유치원을 다시 찾았다.
“다 드린 건 아니지만,
마음만은 꼭 드리고 싶었어요.”
나는 울컥했다.
그 마음이면 충분했다.
그땐 아이의 부모를 원망했다.
책임도 못 지면서 왜 아이를 보냈냐고.
할머니의 김치 한 폭이
때로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 들었다.
그 부모도 사고로 오랫동안 힘든 상황이었다고.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짊어졌을 무게를.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
가정의 형편과 아픔을
조금만 더 일찍 들여다봤더라면
내가 조금 더 따뜻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짐했다.
아이를 바라볼 때,
그 아이의 가정도 함께 보자.
차별이 아니라, 이해를 위해.
리더다움이란,
공정함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과 삶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통해 배웠다.
김치 한 폭에도
오이지 두 쪽에도
진심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