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는 나로 남기로 했다
오랜만에 예전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함께 교사로 일하던 시절,
밝게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관계라는 것이 삶의 여유와 시간,
그리고 경제력까지 필요하다는 걸.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서
나는 하나둘 사람들과 멀어졌다.
마음은 여전히 그리운데
약속은 피하게 되고,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그래서였을까.
그 동료가 먼저 연락을 준 것이
참 고맙고, 반가웠다.
작은 동네 카페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친구는 조심스럽게 화장품 방문판매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현실적인 이유로 곤란함을 전했지만,
그 친구는 오히려 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며 설득했다.
사실은...
그냥 거절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나에게까지 연락했을까.’
그 마음 하나에
나는 결국 두 상자 가득한 화장품을 받아 들었다.
그 뒤로,
나는 그 화장품을 안고
퇴근 후,
용기 내어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대부분은 아예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화제를 돌리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남은 건
상처뿐인 화장품과 빚,
그리고
“그래서 안 된다니까. 멍청하기는...”
이라고 말하던 친척들의 아픈 말.
얼마 후, 또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 친구는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며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 마음이 고마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뒤,
그 친구는 보험 안내서를 건넸다.
마침 보험이 해지된 상태라...
아니...
그냥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가입했다.
그리곤 나도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화장품 이야기를 꺼냈다.
망설이며, 괜찮으면 한 번만 써봐달라고.
그 친구는 조용히 내 말을 듣더니,
잠시 침묵 끝에 단호히 말했다.
“그건 이득이 없어.”
그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 화장품 빚을 갚고 있고,
보험료는 매달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몇 지인들이 찾아와
각종 사업을 권했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왜 하필 이렇게 힘든 나에게…’
그러다 문득,
생각이 달라졌다.
나도 절박하니 누군가에게 부탁했고,
그들 또한 간절했을 거라는 것.
나는 못했지만,
그들은 해낸다는 것.
그것 또한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는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의 반갑고 순수했던
내 마음만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믿기로 했다.
다시 내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가기로 했다.
‘다 잘될 거야.’ 라며
막연히 기다리기보다
최선을 다해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중이다.
오늘도 퇴근 후,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보고서를 쓰고,
논문 리뷰를 PPT로 만들고,
강의 영상을 한 편 챙겨본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렇게 한 줄, 한 줄
내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매일 조금씩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배우고 있고,
삶에 대한 유연함을 익히고 있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나는 지금도 배우는 중이다.
관계와 생존 사이,
그 위태로운 줄 위에서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는 힘.
그건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에서 온다.
나는 오늘도
그 나다움으로 살아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