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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남자니까, 라는 말의 거리

감정을 가두는 문장들

by 정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 있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익숙한 말일수록, 감정은 더 멀어진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우리는 늘 어긋났다.

한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서로를 마주보지 않았다.


사진은 많은 걸 말해준다.

때로는 말보다, 기억보다 더 정확하게.


같은 풍경을 지나며 함께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시선이 담긴 사진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사진을 싫어했다.

단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진을 찍자는 말에, 그는 종종 웃으며 거절했고

때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늘 같은 이유를 꺼냈다.

“나는 남자니까.”


설명도, 웃음도 아닌 그 말은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말처럼 들렸다.


결국엔 내 말에 못 이겨 셔터 앞에 서긴 했지만

셔터가 눌리는 순간에도 그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웃지 않으려는 듯했고,

오히려 단정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는 멋있게 나와야 한다고 했고,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스스로 말했다.

“난 남자야.”


그는 ‘남자다움’이 담긴 이미지를 원했고,

그 이미지 안에서만 감정을 허락했다.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지는 통제하려 했다.


표현은 부끄러워했지만,

보여지는 자신은 철저히 연출했다.


카메라 속 표정이 마음과 다를 때,

그는 종종 불편해했고

결국 사진을 수정하는 건 나의 몫이 되었다.


사진은 언제나 그의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표정도, 구도도, 심지어 그 안의 공기마저도.


나는 그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한 번도 ‘함께’라는 온도로 담긴 적은 없었다.


그에게 사진은 기록이기보다는,

자기 연출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연출 뒤에는 늘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남자니까.”


사진은 그에게 감정을 숨기기 위한 도구였고,

나는 그 안에서 말 없는 거리감을 읽었다.




다시 떠오르는 날이 있다.

이별을 고한 후, 며칠이 지난 새벽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네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그는 말끝을 흐리다, 결국 울었다.

그러곤 덧붙였다.


“나는 남자니까 괜찮아.

올해 울 거 다 울었다고 생각할래.

...그리고, 그건 땀이었어.”


그 문장은 나를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었다.

감정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다짐에 가까웠다.


그 말은 감정의 문턱까지만 다녀간,

스스로 닫아버린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날의 눈물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건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누군가를 설명하기보다

자기방어처럼 들렸다.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역할극이었을까.


나는 그의 말보다

숨기려 했던 감정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감정을 꺼내기보다,

늘 스스로를 다잡았다.


감정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불편해했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그 말을 꺼내 들었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그에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걱정마저도 그에겐 부담이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만큼은 남자이고 싶어.”


그 말은 위로보다, 다짐에 가까웠다.

감정보다 역할을 택하겠다는 고집이었다.


나는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 안에 마음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마음에 끝내 닿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그건 단순한 서툼도, 무심함도 아니었다.

그건 회피형의 본질이었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너무 가까워지면 도망치고 싶고,

막상 멀어지면

잊히는 게 두려운 사람.


그는 나를 사랑했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고 지켜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그 태도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비껴가려는 방식이었다.


그에게 ‘괜찮다’는 말은

감정의 문 앞에서 멈추는 선언이었다.


‘남자니까’라는 말은, 벽이었다.

그 문장은 단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감정을 통제하는 방식,

그리고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자주 말을 잃었다.


감정을 꺼내는 일은,

나를 혼자라는 사실로 데려갔다.

함께 있어도, 늘 어딘가 외로웠다.


나는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었고,

그는 감정을 조용히 감추고 싶어했다.


같은 마음이었을지라도,

감정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는

결국 거리를 만들었다.


그는 감정이란, 나누는 게 아니라

묵묵히 감당해야 하는 짐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꺼내기보단, 숨겼다.


그리고 그 말은

그 감정을 잠그는, 가장 견고한 문장이었다.


감정은 다리였고,

그는 그 다리 앞에, 말로 벽을 쌓았다.


나는 그 문장 속에서,

사랑보다 먼저 감정을 피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감정을 건네는 법을 몰랐고,

나는 감정이 없는 사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사랑은 있었지만, 감정은 함께 건너지 못했다.

감정은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였지만,

그는 끝내 그 다리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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