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있었지만, 전달되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대화를 나눴지만,
그 말들은 감정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확신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에 가까웠다.
그는 들었지만 반응하지 않았고,
감정을 느꼈다 해도, 표현보다는 통제로 반응했다.
이 장은,
그의 반복된 반응과 침묵이
어떻게 감정을 가로막았고,
결국 감정이 전달되지 않는 구조를 만들었는지를 기록한다.
닿지 못한 감정들은 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을 다루는 방식 자체의 어긋남이었다.
마치, 번역되지 못한 언어처럼.
위로는 없었다.
말보다 먼저 인상을 찌푸렸고,
마음보다 먼저 거리를 두었다.
감정 앞에서 그는 늘 회피하거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유했다.
슬픔을 꺼낸 사람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고,
위로보단 불편한 기색이 먼저 드러났다.
나는 그가 고통을 말한 나보다,
고통이라는 정서 자체에 더 반응한 듯 느꼈다.
나는 그가 감정을 위로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병원은 붐볐다.
진료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는 예약을 했음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채혈, 엑스레이, 복잡한 검사들이 이어졌고,
그는 좁은 복도 의자에 나란히 앉아주었다.
이따금 부딪히는 어깨와 손끝이 어색했지만,
시간을 내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무섭다고 하거나, 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단지 검사를 받는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는 자처해서 함께했다.
그 마음은 그 자체로 위안이었다.
그땐, 말보다 행동이 더 솔직하다고 믿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날의 동행에는 마음이 실려 있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시간을 내주고,
좁은 복도 의자에 함께 앉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기다려준 태도.
그건 위로의 말보다 더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가 결과 앞에서 어떤 말을 꺼내줄지,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감정이 표현될 거라는 희망.
나는 그 가능성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단 결과를 듣기 위해 함께 진료실에 들어섰다.
그는 보호자 자격으로 내 옆에 있었지만,
정작 진단을 마주한 건 나 혼자였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되었다.
사실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괜찮아?" 혹은 "놀랐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 순간, 진단을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인 듯했다.
몇 걸음 뒤,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그 결과 못 믿겠어.“
차분히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같이 봤잖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을 타는 동안,
그는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떠한 위로도 없었다.
감정은 사라지고,
나는 어느새 그를 안심시켜야 하는 쪽이 되어 있었다.
며칠 뒤 도착한 메시지는 이랬다.
"걱정하지 마."
"관리 잘해보자.“
그 말들은 안심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를 더 또렷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는 늘 같은 말로 반응했다.
"에고, 아파서 어떻게 해"
그 말엔 온기가 없었고,
크게 내쉬는 숨과 차가운 표정이 먼저였다.
그제야 알았다.
감정을 나눌 자리는,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 왜 바로 헤어지지 않았느냐고.
그런 말 앞에서 나는 잠시 멈칫하곤 한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위로보다 무표정이 먼저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그의 말과 표정은 분명 상처가 되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그가 나름의 방식으로 곁에 있으려 했던 거라고 믿고 싶었다.
잘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렇게 한 번쯤은 견뎌보는 법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이해가 아니라 버팀이었다.
얼마 후,
그의 가족과 식사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가 화를 냈던 반응,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말까지.
그러자 가족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소리야, 걔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는 말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걱정한 사람'으로 남기를 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을 직접 전하지는 않았고,
나는 그가 그저 ‘지켜보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던 것처럼 느꼈다.
멀리선 걱정했고,
가까이에선 침묵했다.
가장 가까운 나에게는
감정 대신 거리를 남겼다.
그는 감정을 다루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는 웃었지만,
가까운 관계 앞에서는
당황했고,
불편해했고,
때로는 화를 냈다.
농담으로 상황을 바꾸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그의 일관된 방식이었다.
표현을 감당하기보다 밀어내는 방식이 먼저였다.
한 가족이 힘든 심정을 털어놓았을 때
그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다른 갈등에서도 걱정보다는 질책이 먼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방식은 늘 같았다.
감정을 마주하기보다는 피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통제했다.
감정은 분명 존재했다.
다만, 그것을 전할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한숨은 말의 자리를 대신했고,
위로는 의심으로 바뀌었으며,
진심은 끝내 벽이 되었다.
한때는 믿었다.
어쩌면, 마음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병원에 함께 있었던 그날처럼,
나를 위로하고 싶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 마음은,
끝내 말이 되지 못했다.
그날,
감정보다 먼저 인상을 찌푸리고,
마음보다 먼저 거리를 만들었다.
그 장면 이후,
나는 감정이 말을 거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무표정과 불신은 그저 태도가 아니라,
감정의 회피라는 구조로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늘 두 가지 반응뿐이었다.
크게 소리치거나,
완전히 침묵하거나.
그 두 가지 반응 사이엔,
어떤 마음도 머무를 자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중심에 놓았고,
이야기의 끝엔 늘 자기 정당화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증명받고 싶어 했지만,
타인의 감정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묻곤 했다.
"그렇게 말 안 하던데?“
그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전할 때,
상대가 함께 느끼기보다
받아내야 하는 위치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상대의 마음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의 방식은 감정을 밀어내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안전한 자리’에만 숨겨두었고,
그 안에서 감정은 고립됐다.
그의 침묵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꺼내는 순간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스스로 감추기 위한 방식에 가까웠다.
그의 반응은 나와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듯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는 더 자주 침묵했고,
감정이 닿을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방식은 반복됐다.
어느 관계마다 감정은 끝내,
닿지 못한 채로 남았다.
그것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었다.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그의 반응 구조가,
결국 모든 관계에 같은 거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