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가두는 문장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 있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익숙한 말일수록, 감정은 더 멀어진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우리는 늘 어긋났다.
한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서로를 마주보지 않았다.
사진은 많은 걸 말해준다.
때로는 말보다, 기억보다 더 정확하게.
같은 풍경을 지나며 함께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시선이 담긴 사진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사진을 싫어했다.
단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진을 찍자는 말에, 그는 종종 웃으며 거절했고
때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늘 같은 이유를 꺼냈다.
“나는 남자니까.”
설명도, 웃음도 아닌 그 말은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말처럼 들렸다.
결국엔 내 말에 못 이겨 셔터 앞에 서긴 했지만
셔터가 눌리는 순간에도 그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웃지 않으려는 듯했고,
오히려 단정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는 멋있게 나와야 한다고 했고,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스스로 말했다.
“난 남자야.”
그는 ‘남자다움’이 담긴 이미지를 원했고,
그 이미지 안에서만 감정을 허락했다.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지는 통제하려 했다.
표현은 부끄러워했지만,
보여지는 자신은 철저히 연출했다.
카메라 속 표정이 마음과 다를 때,
그는 종종 불편해했고
결국 사진을 수정하는 건 나의 몫이 되었다.
사진은 언제나 그의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표정도, 구도도, 심지어 그 안의 공기마저도.
나는 그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한 번도 ‘함께’라는 온도로 담긴 적은 없었다.
그에게 사진은 기록이기보다는,
자기 연출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연출 뒤에는 늘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남자니까.”
사진은 그에게 감정을 숨기기 위한 도구였고,
나는 그 안에서 말 없는 거리감을 읽었다.
다시 떠오르는 날이 있다.
이별을 고한 후, 며칠이 지난 새벽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네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그는 말끝을 흐리다, 결국 울었다.
그러곤 덧붙였다.
“나는 남자니까 괜찮아.
올해 울 거 다 울었다고 생각할래.
...그리고, 그건 땀이었어.”
그 문장은 나를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었다.
감정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다짐에 가까웠다.
그 말은 감정의 문턱까지만 다녀간,
스스로 닫아버린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날의 눈물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건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누군가를 설명하기보다
자기방어처럼 들렸다.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역할극이었을까.
나는 그의 말보다
숨기려 했던 감정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감정을 꺼내기보다,
늘 스스로를 다잡았다.
감정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불편해했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그 말을 꺼내 들었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그에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걱정마저도 그에겐 부담이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만큼은 남자이고 싶어.”
그 말은 위로보다, 다짐에 가까웠다.
감정보다 역할을 택하겠다는 고집이었다.
나는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 안에 마음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마음에 끝내 닿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그건 단순한 서툼도, 무심함도 아니었다.
그건 회피형의 본질이었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너무 가까워지면 도망치고 싶고,
막상 멀어지면
잊히는 게 두려운 사람.
그는 나를 사랑했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고 지켜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그 태도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비껴가려는 방식이었다.
그에게 ‘괜찮다’는 말은
감정의 문 앞에서 멈추는 선언이었다.
‘남자니까’라는 말은, 벽이었다.
그 문장은 단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감정을 통제하는 방식,
그리고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자주 말을 잃었다.
감정을 꺼내는 일은,
나를 혼자라는 사실로 데려갔다.
함께 있어도, 늘 어딘가 외로웠다.
나는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었고,
그는 감정을 조용히 감추고 싶어했다.
같은 마음이었을지라도,
감정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는
결국 거리를 만들었다.
그는 감정이란, 나누는 게 아니라
묵묵히 감당해야 하는 짐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꺼내기보단, 숨겼다.
그리고 그 말은
그 감정을 잠그는, 가장 견고한 문장이었다.
감정은 다리였고,
그는 그 다리 앞에, 말로 벽을 쌓았다.
나는 그 문장 속에서,
사랑보다 먼저 감정을 피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감정을 건네는 법을 몰랐고,
나는 감정이 없는 사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사랑은 있었지만, 감정은 함께 건너지 못했다.
감정은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였지만,
그는 끝내 그 다리 앞에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