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있었지만, 함께 있음은 없었다
인사는 존재를 불러내는 가장 짧은 언어다.
그 언어가 사라지면, 존재는 희미해졌다.
이름이 불릴 때, 관계는 열렸다.
그 부름이 사라질 때, 존재는 지워졌다.
사라지는 건 이름이 아니라,
나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 이름이 빠진 자리에 내가 지워졌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내 여자친구’라며 곧장 내 이야기를 꺼냈다.
인사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내가 한 일과 내 곁의 사람들로 메워졌다.
나는 그 옆에서
장식처럼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창피한 건 아니겠지.
그런데 왜 인사는 건너뛰지?’
그 의문은 오래 마음에 걸렸다.
마치 내 존재가
말끝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가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울 때면
주위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랑 그 사람 아는 사이잖아~.”
그 말은 나를 연결하는 인사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와 가까운지를 뽐내는 말처럼 들렸다.
그의 이모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마중이 있었다는 말조차 없었다.
나는 짐을 들고 뒤따라가다가,
길 끝에서야 이모를 마주했다.
그는 설명도,
소개도 하지 않았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우리 동생이 컴퓨터 하면서
팝콘을 수저로 퍼먹더라”
하고 말을 잘랐다.
아무도 웃지 않았지만,
그는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되뇌었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 독백이었다.
말을 보태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공기만 잠시 흔들렸다.
이야기는 파도처럼 밀려와
모든 여백을 삼켜버렸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었고,
나는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 자리는 늘
남의 이야기를 빌린 자기 자랑으로 채워졌다.
다리 대신 벽이 세워져,
나는 그 앞을 더 이상 건널 수 없었다.
잠시 둘만 있는 시간, 나는 물었다.
“왜 나를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어?”
그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인사를 먼저 건네지 않았다.
“난 일할 때는 내가 먼저 인사해.
네 인사는 네가 알아서 해.”
그 말은 무심함이 아니라,
책임을 밀어내는 선언 같았다.
인사는 그에게 건너뛰는 절차였다.
그 무심함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존재를 지워버리는 방식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남의 자랑이었고,
그 자랑은
관계의 빈자리를 가리는 가림막에 불과했다.
나는 떠올렸다.
그가 내 지인을 만날 때마다 말하곤 했다.
“나는 인사를 못하니까 네가 대신 소개해줘.”
처음엔 실수라 여겼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될수록
그것이 습관이자 방식임을 알았다.
인사와 소개는 배려가 아니다.
관계를 여는 기본 절차다.
그래서 나는
늘 빠짐없이 인사를 시켜주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나를 소개해야 할 자리에서는,
그 당연함이 매번 흩어졌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이해라는 말은, 곧 방치였다.
그마저도 감싸주며,
내가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 순간마다 그의 친구,
그의 친척 역시 어색하게 남겨졌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그 빈자리에 남겨졌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인사 앞에서 잠시 머뭇거릴 때면,
결국 내가 먼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민이에요.”
그 순간 공기는 풀렸지만,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서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이름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는 옆에서 웃기만 했다.
사람들을 관계 속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그 몫을 맡겼다.
“네가 내 친구들이랑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다리를 놓지는 않았다.
그 다리는 놓였지만,
나는 끝내 바깥에 남겨졌다.
나는 내가 예민한 걸까,
지나치게 굴었던 건 아닐까.
그럴수록 더 깊이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곧 알았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회피는 대화와 사과를 넘어,
사람을 잇는 자리에서도 되풀이됐다.
관계를 시작하는 가장 작은 문턱조차
그는 넘지 않았다.
책임을 줄이고, 거리를 남기는 태도는
그의 방식이었다.
가까워질수록 말은 줄었고,
중요한 순간일수록 침묵이 길어졌다.
그는 인사를 관계의 무게로 여겼던 건 아닐까.
결국 그가 택한 방법은
다가올수록 거리를 남기는 일이었다.
그 건너뜀은 습관이자 구조였다.
인사는 부름이자 첫 손짓이다.
그러나 그 부름이 사라지는 순간,
누군가는 공기처럼 옅어졌다.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였다.
인사가 사라진 순간,
관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작별조차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첫 손짓이 사라진 순간,
마지막 손짓도 불가능해졌다.
관계는 끝까지 닿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