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말
이별을 설명하는 건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이 대신했다.
“연하라서 힘들었을 거야.”
“다음엔 연상 만나면 괜찮아.”
그렇게 관계의 복잡함은
단 한 단어로 덧씌워졌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럴까.
사람들은 익숙한 문장을 꺼내왔다.
“남자는 원래 그렇다.”
“여자는 감정에 휘둘리지.”
되풀이되는 말일수록
관계는 단순하게 분류되고,
감정은 구체성을 잃었다.
그 말들은 책임을 흐릿하게 만들고,
결국 ‘원래 그런 것’으로 봉합됐다.
그는 화가 나면 침묵했고,
대화가 필요할 때는 농담으로 흘렸으며,
책임을 져야 할 순간에는 자취를 감췄다.
그 모습은 나이로 설명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건네온 조언은
위로였을지 모른다.
그 말들은 내 상처를 덜어주려는
호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로는 내 경험을 단숨에 축소했다.
그의 회피와 무책임은 결국 ‘연하’ 한마디로 가려졌다.
내가 겪은 복잡한 고통의 결은 사라지고,
단순한 낙인 하나로 덮여버렸다.
마치 조건만 바뀌면 괜찮을 듯이.
내가 힘들었던 건 나이가 아니라,
그가 감정을 끝내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감정을 함께 다룰 그 태도였다.
관계는 이상하거나 정상이라는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는 스스로 기준조차 세우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 태도가 없었다.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후에도 비슷한 조언이 이어졌다.
“두 달만 딱 쉬고 다시 연애 시작해.”
“다른 사람으로 잊는 거야.”
그 조언들은 내 회복을 단순화했다.
나는 그를 못 잊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헤어졌다’는 말 한마디에
무수히 쏟아진 위로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연애나 결혼이 급하지 않았다.
나이가 찼다고 곧바로 다음 관계로 떠밀릴 이유도 없었다.
다만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 규정할 수 없는
고유한 회복의 과정이었다.
그런데도 가까운 지인들은
자기의 극복법을 정답인 듯 들이밀었다.
“난 바로 여행 갔더니 괜찮아졌어.”
그 말은 위로처럼 포장됐지만, 결국 압박이었다.
정작 그들 또한 오래 무너졌으면서도 내게 방식을 강요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앞으로는 성숙한 사람을 만나.”
성숙함은 상대적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감정이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누구에게는 성숙해 보여도 다른 이에게는 미숙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나와 맞는 성숙함이다.
나는 이제 안다.
회복이란 남이 정해준 시간이 아니라,
내가 세운 기준을 지켜내는 과정이다.
내 감정을 온전히 다루고,
누군가의 감정을 함께 짊어질 수 있다.
때로는 느리고 불완전해 보여도,
그 불완전함 속에서
나는 조금씩 성숙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연상이어서, 연하여서.
남자라서, 여자라서.
혹은 몇 달만 지나면 잊힌다고.
그 말들이 정말
관계와 회복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내가 만난 그는 나보다 어렸다.
결국 중요한 건,
그가 감정을 끝내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단정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역시 연하는 쉽지 않다.”
혹은
“남자라면 다 그렇다.”
라며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 지나면 다 잊는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상처 앞에서는 단순한 이유로 위로받고 싶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런 말은 구조를 가린다.
상대의 선택과 태도를 흐린다.
나는 잠시 흔들렸지만,
곧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말들에 기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기록한다.
감정의 당사자가 아니라,
구조의 관찰자로서.
나는 이제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며,
앞으로도 내 기준을 흔들림 없이 지켜갈 것이다.
그 기준은 태도와 책임,
나를 지키는 방식이다.
나는 내 길을 선택하며 서서히 나만의 회복을 시작한다.
이 기록이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