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줄 수 있을까?
“와 너 진짜 생산적으로 산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던 나에게 건넨 반응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작은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이룬 것도 없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도 않은데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번 달의 나는 지난달의 나와 똑같다. 30일 사이,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계획은 늘 많지만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차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적게 노력하니 이룰 수 있는 것도 적다. 누군가는 브런치로 컨택을 받아서 원고를 쓴다. 또 어떤 사람은 브런치로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글을 쓸 뿐이다. 이런 걸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7월의 끄트머리에서 한 달을 돌아보았을 때 시원하게 '잘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렇다고 느껴질 뿐이다.
나에게 나는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다. 늘 백 점을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애매한 80점이 최선이다. 못 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한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어디쯤에 머문다. 내 최선이 80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아무리 애써도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는 열심히 하는 것에 의의를 둘 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는 그 자체만으로 칭찬해 줄 수는 없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구나 열심히 한다. 아니 애초에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게 맞을까? 백 점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는 스스로도 밉고, 백 점을 쉬이 얻을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것도 아쉽고, 백 점을 위해 힘껏 달려 나갈 수 없는 상태도 서글프다. 모든 것이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지금 모습 그대로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보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일이 더 쉽다. 각자에겐 각자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생이란 것이 어떤 것이 낫고 어떤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부족한 내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히면 스스로를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우울증이 깊었던 시절 먹고, 자고, 씻는 게 버거울 정도로 일상생활이 망가졌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그런 나에게 아침, 점심, 저녁만이라도 시간을 정해 잘 챙겨 먹어보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다음 상담시간,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나에게 선생님이 물으셨다.
“아침씨가 생각하는 시간을 정해 식사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8시, 12시, 6시 정해진 시간에 먹는 거요”
선생님이 웃으셨다.
“편하게 합시다. 그냥 오전 8시부터 오후 12시를 아침으로 하고, 오후 12부터 5시까지를 점심, 5시부터 9시까지 먹는 것을 저녁이라고 생각합시다. 지킬 수 없는 계획을 세우지 말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내가 불가능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 스스로를 괴롭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에게 엄격한 선생님이었고, 변호할 틈을 주지 않는 판사였다. 그렇게 나를 몰아세운 시간들이 나를 망가트렸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나는 사람들은 많이 태우고 거친 바다를 거침없이 항해하는 멋진 여객선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얕은 개울가에서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조그만 나뭇잎 배 같다. 하지만 나뭇잎 배에도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왕관의 중앙의 크고 화려한 보석은 아닐지라도, 어디 끄트머리에서 고만고만한 녀석들과 함께 자리한 깨알만 한 보석일지라도, 그 왕관 위에는 그만의 자리가 있듯 나에게도 나만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고 기대했던 것이 되지 못해도, 영원히 애매하게 살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더라도, 그 길 끝에서는 오롯이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