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브라스킹의 탄생

by 하린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이었을 때,

엄마는 “여자아이는 피아노 정도는 배워야 한다”면서

나를 동네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그 학원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작은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 옆엔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고,

간판은 살짝 바랜 하늘색 플라스틱 간판이었다.

‘도레미 피아노’.

그 시절엔 그런 간판이 동네에 한두 개쯤은 꼭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연습실 몇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제일 안쪽엔 원장 선생님 방—

거기엔 동네에선 보기 힘든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던 그 피아노 앞에 서면,

괜히 목도 가다듬고 자세를 고쳐 앉게 되는 그런 느낌.

어린 나한텐 그게 마치 궁전의 악기처럼 보였다.


그 피아노 학원 원장님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골저스 했다.

약간 통통하시고, 금테 안경을 끼시고,

풍성한 볼륨의 세련된 커트머리.

벨벳 소재의 검정 원피스를 즐겨 입으셨고,

말소리는… 딱 소프라노.

말할 때마다 멜로디처럼 울렸다.


그때 유치원 다니던 서준이는

내가 학원 가면 꼭 따라왔다.

어린 눈에는 원장실의 웅장한 그랜드 피아노며,

땅땅땅 울리는 연습실 피아노들이

세상에나, 얼마나 신기했겠어.


근데 원장 선생님이 또, 서준이를 엄청 예뻐했다.

서준이가 오면

“아이고~ 우리 서준이 왔나?” 하면서

그 웅장한 그랜드 피아노로

서준이가 좋아하는 동요를 진짜 우아하게 연주해주시기도 했다.

서준이는 그게 너무 좋았나 보다.

그래서 나 따라 피아노 학원 오는 걸 좋아했다.


근데 어느 날, 서준이가

어디선가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하는 사람을 봤는지

갑자기 피아노 학원 와서 자랑을 했다.


“선생님~ 내 이제 서준이 아니에요~

아브라스킹이에요~!”


원장 선생님은 웃음이 빵 터졌다.

“하하하하하~ 아브라스킹? 우와~ 멋진 이름이네!

알았다, 앞으로 아브라스킹이라고 부를게~”


그리고 한 일주일쯤 지나서,

서준이가 또 나 따라 학원에 놀러 왔다.


그때 원장 선생님이

서준이를 보자마자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오우~ 우리 아브라스킹 왔나~?”


서준이는 처음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뭔 소리야…”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기억이 났는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 맞다~ 내 아브라스킹이에요~”


그땐 그냥 그랬다.

피아노 학원에 따라붙는 동생이 귀찮기도 했고,

원장 선생님이 잘해주는 것도

당연한 줄 알았다.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게

참 따뜻하고 고마웠다.


서준이는 그때 참 천진난만했다.

세상물정 모르고 뭐든 신기해하던 아이.

지금은 많이 컸고,

그때처럼 순진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나보다 더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그립다.

그 시절,

서준이가 나 따라 졸졸 따라오던 그 모습도,

아브라스킹이라 불러주며

동요를 연주해 주시던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도.


그건 그냥 스쳐간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가끔

되돌아가고 싶은 장면처럼 아프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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