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연히
기찬이를 만나고,
나는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곁에는 늘
무기력과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 불안이 처음으로
내 앞에 ‘모양’을 갖추고 나타난 건
기찬이와 사귄 지 9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그날도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집에 있었고,
입고 있던 옷은
기모 맨투맨에 기모 레깅스.
포근한 옷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이유도 평범했다.
손을 씻으러 들어갔는데,
다음 순간—
나는 샤워기 줄을 잡고,
그 줄로 내 목을 감고 있었다.
그게 너무 순식간이어서,
내가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몰랐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목을 감고 있는 내 얼굴.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순간,
스스로에게 소름이 끼쳤다.
겁이 났다.
내가 괴물이 된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는 그대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핸드폰도 안 들고.
3월이었다.
춥고, 바람 불고,
나는 그 기모 옷 하나만 입은 채
아무 방향도 없이 동동거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핸드폰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옷도 챙기지 않았고, 지갑도 챙기지 않았다.
핸드폰만 들고 다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추웠고,
나는 달달달 떨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이상한 생각이 든다.”
엄마는 울면서 말했다.
“왜 카노… 엄마 무섭구로.. 우리 딸…”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몹쓸 말이었다.
하지만 그땐
살고 싶어서 뱉은 말이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제야
기찬이에게 전화할 수 있었다.
“기찬아,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지금 당장 와줄 수 있나?”
기찬이는 평소엔 느릿느릿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그는 미친 듯이 달려왔다.
원래 한 시간 스무 분은 걸릴 거리인데
그날은 오십 분 만에 왔다.
내가 보기엔
그건 기적이었다.
나는 핸드폰만 들고
기찬이 차에 올라탔다.
기찬이는 말없이 나를
청년다방으로 데려갔다.
떡볶이를 주문하고,
내가 할당량을 다 먹을때까지 지켜봤다.
그리고는 차 뒷좌석에서
엄청 커다란 롱패딩을 꺼내
내게 입혀주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단추까지 다 채워주었다.
나는 눈사람처럼
푹 감싸였다.
기찬이는 차를 몰아
분당 율동공원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말했다.
“내려.”
나는 내렸다.
기찬이는 내 손을 잡고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밤,
그 겨울 공원 두 바퀴를
말없이 뛰었다.
숨이 찼다.
얼굴은 차가웠고,
손은 뜨거웠다.
그리고 그날 밤,
기찬이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서,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그날 이후,
나는 하나를 배웠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도
그 순간을 넘길 수 있다는 것.
불안은 지나간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
그때부터 나는
불안이 오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장사를 하는 진호,
잠결에도 전화를 잘 받아주는 상아.
그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기찬이가 하루는 말했다.
“다은아,
제발…
정신과 좀 가보자.”
기찬이는 빌듯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정신과의 문을 열게 되었다.